윤이산 시인 / 아무렴
봄이 온다 '아무렴' 꽃이 진다 '아무렴'
외할머니는 사시사철 바다 향해 의자를 내놓고 앉아 계셨지 온종일 '아무렴' ‘아무렴’ 중얼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지
신열이 펄펄 끓던 밤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이마를 짚으며 '아무렴' '아무렴'만 하셨지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파 운신조차 어려울 때 누군가 차려 내오는 따뜻한 미음처럼 당신이 건네준 '아무렴'
이젠 내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봄이 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꽃이 지지
'아무렴'
나도 바다를 향해 의자 하나 내놓았거든
물고기 잡으러 간 외삼촌이 자신이 던진 그물에 걸려 돌아온 바다
윤이산 시인 / 노을
누가 펄펄 끓는 하루를 들고 가다 그만, 양동이를 엎질러 버린 게 틀림없다. 이녁까지 뜨끈하다.
윤이산 시인 / 간보다
간 본다 내 간은 숨겨놓고 상대의 간을 꺼내려 간(間)을 노린다 여의치 않으면 내 간을 먼저 꺼내놓고 흥정을 터 보기도 한다 간이 배 밖에 나온 간 큰 놈들은 상대의 복장에 바로 손을 쑥 집어넣어 간을 꺼내기도 하지만 잘못 건드렸다가 간 떨어질 뻔한 위기도 맞는다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간 맞추기 서로 간보다 입맛 맞으면 친구 간이 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을 때는 간에 붙으려다가 쓸개에 가 붙기도 한다 간 보다 피로해진 간이 랑게르한스섬처럼 떠 있다
-시집 『물소리를 쬐다』 (실천문학,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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