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국 시인 / 침묵의 도서관
죽고 사는 일이 물소리처럼 아릿하다, 여기는 온통 침묵을 베껴 적은 일생일대의 저작물들 죽음은 없고 묘비만 남은 생애들, 온통 여기서 황금빛 서가를 물들이고 있다
형체는 없고 기억만 살아 있는, 여기는 온통 끝없는 갈림길의 문장들, 침묵의 발걸음이 한 뼘 두 뼘 숨을 쉬고, 서가에 이마 기댄 이들의 일평생, 한낱 꿈으로만 흘러갈 순 없으니 오늘하루의 회전문 곁에 빗물 젖은 우산이 꽂혀 있다
창밖의 나뭇잎을 흔드는 빗방울들 영원의 찰나를 깨워놓는데 사진 속의 여자는 말이 없다 등을 구부린 채 한사코 액자 밖으로 팔을 내뻗고 있다 백 년 전의 이야기처럼
하루의 길이는 달라지지 않는데 일몰의 빛은 짧고 침묵의 투숙객이 펼쳐놓은 방명록, 묵직한 손 글씨가 그 일생의 행적을 말해주는데 결국은 모래시계처럼 비워지는, 여기는 온통
오정국 시인 / 파묻힌 얼굴
기꺼이 무릎 꿇고 절을 하듯이, 머리를 진흙 속으로 들이밀고, 벌거벗은 궁둥이만 보여 주시는 나의 어머니, 저렇듯 얼굴을 뭉개어 진흙이 되셨으니, 그 기쁨 홀로 누리시도다 진흙을 처발라 출구를 봉해 버린 참나무 불길을 견디시고 이기셨으니 그 고통 세세연년 당신 몫이옵니다
타관을 떠돌던 낡은 가방 내려놓고 노숙의 험한 망치와 목장갑을 등 뒤로 감추고 이마에 재를 바르듯, 당신께 나아가 두 볼의 눈물을 경배하고자 하오나 얼굴은커녕 발가락마저 궁둥이로 눌러서 감추어 두셨도다
진흙 속으로 캄캄하게 묻어 버린 눈, 눈꺼풀을 어떻게 열고 계신지, 진흙을 눌러 붙인 사방의 손자국을 둘러보는 것인데, 오, 엉덩이로만 빛의 윤곽을 느끼시는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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