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시인 / 벼룩의 천정
아버지는 깡총 깡총 뛰는 벼룩을 잡았다. 아버지는 그 벼룩을 길다란 유리병 속에 넣었다.
유리병 속에 들어간 벼룩은 깡총 뛰었다. 그것은 놀라운 점프력이었다. 제 키의 백배도 더 되는 높이의 유리병을 훌쩍 뛰어나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다시 벼룩을 잡아서 유리병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리병 뚜껑을 살짝 덮었다.
물론 이번에도 벼룩은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애석한지고! 유리병 뚜껑에 콩콩 머리를 부딪치게 되자 벼룩은 이내 다소곳해졌다.
얼마 후, 아버지는 유리병 뚜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탁 쳐서 벼룩을 놀라게 하였다. 벼룩은 깜짝 놀라서 깡충깡충 뛰었다. 그러나 보라! 유리병을 벗어날 수도 있었던 천부의 점프력을 지닌 벼룩이 유리병 뚜껑의 그 아래 높이만큼만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왠 일이지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더 이상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한 높이까지만 점프하는 습관이 들어 버린 것이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결론을 말했다.
"네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믿어라.
혹시 무한히 열려 있는 하늘을 네 스스로 천정 치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며 살기 바란다."
-정채봉 시인의 '나는 너다' 에서
정채봉 시인 / 영덕에서
푸른 바다를 보고 있다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얼른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아 하늘 역시도 푸르구나 내 눈물도 푸를 수밖에 없겠다
정채봉 시인 / 슬픈 지도
사랑하는가?
눈물의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슬픈 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정채봉 시인 / 길상사
다닥다닥 꽃눈 붙은 잔나무가지를 길상사 스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퇴근하면서 무심히 화병에 꽂았더니 길상사 진달래로 피어났습니다
정채봉 시인 / 내 안의 너
내 키의 머리 끝자리까지 내 몸무게의 소수점 끝자리까지 가득가득 차서 출렁거리는 내 안의 너
정채봉 시인 / 수혈
가을 새벽녘 찬바람이 느껴져 방 웃목의 홑이불을 잡아당긴다
아무리 힘주어 끌어당겨도 당겨지지 않아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것은 창을 넘어 와 있는 새벽 달빛
문득 달빛 속으로 팔을 내민다
정채봉 시인 / 해질 무렵
바람에 몸을 씻는 풀잎처럼 파도에 몸을 씻는 모래알처럼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헹구고 싶다 지금은 해질 무렵
정채봉 시인 / 그때 처음 알았다
참숯처럼 검은 너의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눈을 뜨고도 감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그믐밤 길에 나에게 다가오던 별이 있었다 내 몸 안에 스러지던 별이 있었다 지상에도 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채봉 시인 / 바다에 갔다
바다에 가서 울고 싶어 결국 바다에 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서 있는 것처럼 그냥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채봉 시인 / 해당화
세상의 푸르름을 다 거두어들인 바다한테도 슬픔이 있어 한 송이 꽃을 피웠다
정채봉 시인 / 바다가 주는 말
인간사 섬바위 같은 거야 빗금 없는 섬바위가 어디에 있겠니 우두커니 서서 아린 상처가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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