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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라라 시인 / 떨어진 자화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4.

최라라 시인 / 떨어진 자화상

 

 

햇빛 잘 드는 창가에 앉으면

나는 한 올 떨어진 머리카락

뒤틀리거나 꼬이거나

하찮은 비애일수록 그곳에선 생생하지

날개가 없으므로 침묵으로 흐를 뿐

생각은 익숙한 악취처럼 흐르지

누가 나를 잡고

바닥 없는 바닥을 향해 던져주었으면

허공을 끊임없이 굴러

버려진 사랑 같은 곳으로나 흘러내렸으면

지나가는 발에 나도 모르게 붙어있다

탈색됐군, 제대로 타락했어,

그런 소리 하면서 누군가

두 손가락으로 나를 집을 때

나는 정말 집시처럼 유려한 여인이 되어

그 사람 단번에 홀려놓았으면

햇빛 가장 좋은 구석에서 보기 좋게 차였으면

그렇게 울며불며

한 백 년쯤 흘려보냈으면

사월은 봄이 아니고

생일은 잔치가 아니고

아무리 흔들려도 한 발짝 움직일 수 없는

나는 한 올,

 

 


 

 

최라라 시인 / 독감

 

 

오늘 내가 왜 행복한가 생각해 봤더니

어젯밤의 악몽 때문이었다

반만 잠든 내가

반만 깨어있는 네게로 건너가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는데

누군가 자꾸 내 몸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

너는 차갑고 나는 뜨거웠는데

너도 같이 뜨거워져 길길이 날뛰는 순간이 좋았다

방 구석구석 헤매며 목 터져라 울부짖는 순간이

좋았다

네가 반쪽의 내 심장을 차갑게 쓸어내렸을 때

나는 꿈이라는 걸 알았다

조금씩 네가 되어 싸늘해져가는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최라라 시인

1969년 경주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천년의시작, 2017)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