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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보경 시인 / 소나기 그치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4.

하보경 시인 / 소나기 그치고

 

 

햇살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회화나무 아래

 

올리브가 지천인 나라를 여행하는 중이라고요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요

 

하늘과 구름과 바다가 있어서

세계의 경계는 아직 온전합니다

 

새를 사랑하는 사람과

새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지구는 엉망으로 외롭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아득하게 흘러가고

회화나무 잎들이

제각각 바람에 흔들립니다

 

익숙한 듯 낯선 풍경 아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들을

차분히 밀어내며

 

고요히 흔들리며 떨어지는

방울

방울

 

『미래시학』, 2019년 가을호.

 

 


 

 

하보경 시인 / 백만 년 동안 잘 익은 사과를 기꺼이 내게 주세요

 

 

그늘은 그늘을 다독이며 길어진다

나는 나를 위로하며 자꾸 증발한다

괜찮아? 묻는 너의 목소리가 안 괜찮아 보여

 

새장을 빠져나간 새와

새장에 갇힌 새의 마음을 분류하다가

혼자서 열심히 노래하는 부엉이 시계를 보았지

 

사각의 파란 테이블 아래

럭비공처럼 긴장을 말고 있는 황금색 고양이

 

사과 생각에 골몰하던 거리

사과에 사과를 거듭해도 풀리지 않는 거리

사과만큼의 거리가 목구멍에 걸려 캑캑거려도

 

그저 그렇지, 아무것도 아니지

카푸치노를 목에 흘린다

동시다발로 위로하는 따스함

싱싱한 사과가 생각난다.

그토록 원하던 진실

 

아무것도 아닌 하루, 우주 같은 하루가

그늘과 그늘을 지우며 황홀하게 저물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 그대로 가만히 그대로

 

괜찮은 거지?

나는 자꾸 등이 가려울 뿐

 

『현대시』, 2019년 9월호.

 

 


 

 

하보경 시인 / 다정한 꿈

 

 

누구의 손인지 모를 흰빛이 교차하고

화려한 꽃다발 문양이 순간, 스쳤어

 

세 사람, 네 사람, 어느 한 사람

모르는 공간은 이미 아는 공간이었어

 

시간은 무기력하게 공간을 줄였다 늘리고

꽃잎 다섯 장의 끝은 비스듬히 말려있었어

 

나는 좋아서, 그냥 좋아서 소리 없이 하하하 웃고 있었는데

 

소리는 자꾸자꾸 내 목을 감아올려

빛이 폭죽처럼 기어이 부서져 내리는 거리

 

검은 모자 속 작은 새는 검은 모자에 둥지를 틀고

두 사람, 한 사람, 이상한 사람

 

누군지 모를 흰 손은 흰 손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사라지는 중, 엉킨 실을 자르는 중,

물끄러미,

 

꿈을 깨면서, 꿈을 꾸면서

모서리를 지우면서

 

사방으로 꽃을 피우는 재채기

 

흰머리에 흰빛이 나는 오래전 얼굴이

이상하게 다정해서

자꾸 꿈을 꾸는데

또 자꾸 꿈이 깨어

 

슬프고 어쩐지 또 다정한 꿈속에서

사라지는 중, 나타나는 중

한 사람, 또 한 사람, 다정한 사람

 

『노이즈』, 2019년

 

 


 

하보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14년 《시사사》로 등단. 2020년 제6회 시사사작품상을 수상. 2021년 첫시집 『쉬땅나무와 나』가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