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용 시인 / 달 지기
달은 밤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박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이 내면에서 올라온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자정 무렵 퇴근길에서 보면 구만리 하늘에서 보내는 눈빛인지도 내가 한세상 돌아간 후에도 당신은 지켜보고 있으리라 나의 등이 쓸쓸하다 생각하여 당신은 마음을 달구어 존재를 내밀고 있는 것인가 어느 날 문득 가방이 무거울 때 어깨를 잡아주는 지하철의 손잡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목구멍 모양이 뻗은 손마다 잡아주다 가방을 내려놓자 하루살이들이 내 등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방 속에 달라붙는 것을 보았다 가로등도 밤에는 등골이 아프겠지 등(燈)은 아파트로 가는 길목마다 멀리서 자기를 보며 하루의 생을 끌고 가는 달 지기가 되는 것인가 병든 측백나무가 밤에 금빛같이 보일 때 얕은 땅에 박고 사는 영혼이 흐르는 것이라 한다
한경용 시인 / 라마
마추픽추가 잠들 무렵 라마는 안데스를 가르던 바람을 싣고 걸어온다. 우름밤바 강이 허기진 옥수수밭을 휘감을 때까지 독수리의 전갈을 들으려 신전에 묻힌 혼들을 위해 귀를 씻는다.
예언이 끝나는 곳에 푸른 하늘을 믿는 검은 눈동자가 머언 산을 바라본다. 모래에 묻힌 메아리를 기다리며 잊히지 않기를 다시 기원해 보지만 정복을 무너뜨리지 못한 요새 발목에 묻힌 풀벌레들 께나와 산뽀니아를 들려줄 성곽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몰락을 삼킨 태양신의 후예가 매트로 전철역 광장에 와 있는가 날아간 철새의 곡조가 지하도를 따라 떠돈다. 잉카의 정령들이 먼지로 씻은 밤 오지에서 홀로 취해야 하는 적막을 알기에 산정에서 내려온 새들이 아침을 알려도 라마는 구비전설로 떠돌던 광야를 지우지 못한다.
한경용 시인 / 질투는 푸른 색
안녕 빈센트, 젊은 목선이 타히티로 왔네 자네와 다투고 헤어진 게 미안하던 참에 도록을 위한 서문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받고 반가웠네 파리의 무게를 놓아준 목선은 에메랄드 위를 떠돌다가 총독부 관저 첨탑 아래 바다로 흩어졌네 일몰이 외침을 지니고 흔들리기 시작했네 나는 어둠을 삼킨 심장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네 흔들리는 그림들은 어쩌다 벽 위에 선 내가 꿈꾸던 표정들이라네 보라보라 섬을 휘도는 햇살은 안개를 걷어 헤치고 온 내게 무척 낭만적이었네 지금도 자네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을 테지 검은 배경에 야윈 볼과 고집스러운 매부리코 팔레트와 붓을 들고 이젤 앞에서 두려움으로 응시하던 자네의 모습을 난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었지 나는 섬 한 바퀴를 돌고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낮에는 여인들을 그리고 있다네 사람들이 무어라고 수군거리는지 알 수가 없네 노을이 질 때까지 수렵은 일상이며 파도가 몰아치는 밤도 있었다네 녹청색 유혹을 하는 기슭까지 달려가 비를 주룩주룩 마시며
떨어진 열대과일도 먹으며 파도타기 하는 나를 상상해 보게 파리는 지금 안개가 끼거나 눈발이 꽁꽁 언 겨울이겠지 살롱 '푸른 방'에 드나들던 세잔과 마네, 모네의 그림들은
잘 팔리고 있을 테지 이따금 몽마르트르가 그립지만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을 것이야 녹색 구렁이가 여기서는 넘실거려 그것이 나르바나이지 않겠나 난 진정 무능하기를 원했네 평론가와 화상들로부터 팔리지 않는 추궁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파리의 삶은 가장의 무책임, 아내의 이혼 요구,
도덕적 양심 어느 하나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네 목가적인 삶과 캄캄한 궁륭 사이에서 나의 잠은 정글 속에 있었고 회복기, 예술가의 눈에 비친 황량한 허무주의 그것이 나의 유미주의였다네. 나의 이브와 당신의 이브를 비교해 보게 날 것의 언어가 타협과 오해로 오렌지색에
주눅이 들지 않고 빨간 개가 옆에서 잠이 들 때 원초적인 파랑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네 어떤 식물학자도 몰랐던 그 세계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오직 나만이 그릴 수 있었던 낙원이 아닌가 싶어 그럼 다시 파리의 공기를 마시러 갈 때까지
기다리게
폴 고갱으로부터
한경용 시인 / 나비의 뼈
나는 한때 북촌이 만든 경계석인 감고당 길을 날던 나비 오동나무 위에서 폭풍우 가르던 날도 있었지
여름이면 난향(蘭香)에 취해 나래를 접거나 십장생 연꽃자수 궤목 안에서 숨 막힌 적도 결마다 방향이 다른 연잎 수놓은 물은 화려했어라
고가(古家)의 사랑방에서 내려놓지 못한 가야금 산조에 사대부는 언어의 샘이 타들었나 퇴청 마당에 핀 나리꽃은 바람이 탈색한 무늬 육신이 재가 되어 부는 날 한 줌의 기록은 꽃대의 흔적으로 무너진다
딸기와 블루베리가 얼붙은 글라스 용달에 가득 펼친 가회동 삼거리 길에서 만난 양반탈과 말뚝이탈이 북촌의 정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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