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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기 시인 / 시계 이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5.

김광기 시인 / 시계 이빨

 

 

여전히 새 시곗줄은 내 손목보다 크다.

중학교 다닐 때쯤부터일 거다.

한 칸 한 칸 안쪽으로 핀을 옮기면서

시곗줄과 손목을 맞추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어쩌다 맞게 되더라도 한쪽만 줄인 불균형으로

시계 몸체는 저만치 밀려나 있고

째깍째깍 시간을 깨물고 있는 듯한

가지런한 금니 치열의 시곗줄에만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며칠을 차고 있다가

벼르고 별러서 들르게 되는 시계포다.

주인이 뚝딱뚝딱 몇 번 만지고 나면

앓고 있던 충치 뽑히듯 시원하게 시계이빨이 몇 개 뽑혀

손목에 딱 맞는 시곗줄이 된다.

그때마다 시계포 주인은 빼낸 시곗줄을 비닐봉지에 싸서

다음에 필요하면 쓰라고 건네준다.

그것을 다시 쓸 일은 없다.

책상 서랍 구석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어떻게 치워졌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게 된다.

오늘도 시계포 주인은 어김없이 시계이빨을 싸준다.

다음에 필요하면 쓰라는 말은 세월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버리라고 한다.

그래도 시계포 주인은 아까운 듯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을 한쪽 구석에 밀어둔다.

웬일인지 충치 뺀 것을 버린 것처럼 시원치가 않다.

그냥 쓸데없는 거지만 서랍 한쪽에 두었다가

예전처럼 그렇게 버리는 방식이 좋았을 것 같다.

쓸데없다고 함부로 버리지 않았던 것을

그렇게 냉큼 잘라서 버린

마디 깊은 어디 한쪽 없어진 것이

삶의 나머지 골격들을 짜 맞추고 있다.

 

 


 

 

김광기 시인 / 빙어, 바람소리

-빙어 먹는 법

 

 

늦가을 마지막까지 버티던 낙엽들 말라비틀어지고

제 몸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파르르 떨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칠 때쯤

호숫가 매운탕 집에서 시킨 치어를 통째로

오독오독 씹어 먹는 맛이다. 꼬리를 잡아야 한다.

괜히 눈을 좀 가려보겠다고 머리부터 잡고

초고추장을 찍었다간 사정없이 치대는 꼬리 땜에

얼굴이며 몸 여기저기에 고추장 세례를 받는다.

꼬리를 잡으면 놈의 발광이 좀 멈춰지는 듯도 하다.

저도 대가리를 가진 것이라서 어지럼증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흔들어대지는 못하는 것이다.

대가리부터 초고추장에 푹 찍어 놓는다.

그 말갛던 눈, 헐떡이던 아가미, 투명한 몸뚱이가

맛깔스런 횟감으로 변신하게 된다. 먼저

대가리부터 입에 넣고 허리쯤 되는 척추 부위를

앞니로 아작, 두 동강이를 내서는 대가리 부분과

꼬리 부분을 한 입에 넣고 씹는다. 눈알이 터지고

대가리가 작살나는 것을 생각하자. 몸통이 으깨져서

다 보이던 내장이 터지고, 등 가시 울툭불툭

찰진 살결 한 데 섞여 아삭아삭 씹힌다.

휑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바람소리 들린다.

알싸하게 속이 채워진다. 호수의 요정, 말갛게

바동대던 것을 삼키며 놈의 꼬리부터 다시 잡는다.

 

 


 

 

김광기 시인 / 박쥐여자

 

 

어둠 속에 숨어들기 시작한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여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집을 짓는다.

굽이굽이 캄캄하고

막막한 산길을 걷던 어머니처럼

캄캄한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

삶과 어둠의 경계를 감지할 수 없을 때

여자가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세상을 가늠한다.

웅얼웅얼 설거지물들이

개수대 속으로 빠진다.

마지막 남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외성으로 뻗는 탄성의 소리를 낸다.

가끔씩 여자의 동공이 비어있다.

여자의 눈을 보며 불길함을 짐작하지만

여자의 눈은 의외로 편안해 보인다.

박쥐의 눈을 가진

여자의 눈 속에 어둠이 있다.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의 전략과 논술』 등이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아주대 등 출강. 학점은행제 <한국보육교사교육원> 운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