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시인 / 풀비
풀비 지나간 자리마다 격자 문살 도톰하게 살이 차오르고 누렇던 달빛 깨끗해진다
엄마가 풀비로 달빛을 쓸 때, 여러 겹 덧발라진 자리가 먹구름 층층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들창문과 달이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문종이가 말라가면서 환하게 달의 뼈가 보였고 풀벌레소리 투명해지자 한층 밝아진 문살이 팽팽하게 달빛을 펴고 있었다 밝음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어둑한 문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 부지런한 엄마에게 배웠다
꽃 핀 싸리나무를 엮어 마당을 쓸 때, 후드득 떨어지는 꽃들 마냥 덜 풀어진 밀가루 덩어리들이 툭툭 문살 위에 꽃으로 불거졌다
풀비 지나가고 불을 켜면 방안이 따뜻하게 비쳤고 불을 끄면 마당이 포근하게 빛났다
김경숙 시인 / 고리 이야기
어제 뽑은 인형엔 모두 고리가 달려있었습니다 매달릴 수 있어야하고 매달려야만 한다는 안간힘으로 들렸습니다 첫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 문득, 아이를 가방에 매달아 보낸다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방은 잉여의 부피 같아서 사람이 옮길 수 있는 최대의 무게니까요 아이는 그 후로 쭉, 지금껏 가방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모든 꽃들의 꼭지도 알고 보면 고리입니다 모과가 없는 모과나무나 탱자가 없는 탱자나무울타리는 없으니까요 자꾸 늙어가는 몸 어딘 가에도 망가졌거나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고리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만 유독 가을만 깊어서 고리를 사이에 두고 여물거나 자꾸만 파치가 되려 합니다 그러니 매달리는 일과 매달려야만 하는 일들 사이엔 절그럭거리거나 삐거덕거리는 고리 하나쯤 있어도 무방하겠습니다
김경숙 시인 / 꽃의 졸음
한낮 화단에 꽃들이 목을 꺾고 졸음에 빠져있다 식물은 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만 사람에겐 꺾이는, 꺾여야만 하는 곳이 많다
식물은 선선해지는 저녁 무렵 옅은 먹빛이 잠을 불러들이겠지만 사람은 무의식 중에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는 목을 가누는 것이다 더위가 가득 든 식물의 졸음과 그늘이 꾸벅꾸벅 흔들리는 사람의 졸음은 한낮이 곤한 이유처럼 노곤한 방심에 든다
여름이란, 아래가 받치는 날들이다 기둥 하나 없이도 막중한 한낮의 폭염을 받치고 초록으로 햇살을 향해 맞불을 놓는 아래의 목록에 슬쩍 끼어들어 가장 환한 날을 탕진하는 것이다
저 햇살 아래 꽃들 목마른 뿌리의 근심을 목에다 두고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김경숙 시인 / 마당을 나누다
우리 집 마당에는 낮의 마당과 밤의 마당이 있다 낮의 마당에선 뙤약볕을 빌려 고추를 말려도 좋고 바지랑대 걸쳐놓고 속옷을 널어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금 긋고 자리 깔아 온갖 마당놀이를 하는 한마당이 제격이다
다만, 밤의 마당은 눈 밝은 것들에게 내어주자 두더지 두꺼비 반딧불이, 간혹가다 고라니나 멧돼지 가족들까지 마당에 놀러와 유유히 달빛을 굴려도 좋겠다
밤의 말을 쓰는 것들은 밤의 마당을 쓰고 말놀이하는 사람은 낮의 마당을 쓰게 하자는 것이다
그어 놓은 실금도 없이 둥글거나 네모난 규칙 없이도 그저 캄캄한 밤 하나로 마당을 놀다 가는 것들
낯익은 발자국에 고인 이슬을 쓸어내며 낮이 해야 할 일을 밤이 하는 것을 가끔 본다
김경숙 시인 / 당겨야 쓸모 있는
적당한 거리란 고무줄에 해당되는 간격이 아니므로 고무줄의 거리를 믿지 않기로 한다
당길수록 더 불안해지는 거리들
서로의 쓸모를 원한다면 몇 배수 숨어있는 고무줄의 거리를 다 끄집어 내야한다
한 손아귀에 움켜쥐었다고 감추었다고 다 끝나는 인연이 아니다 늘이고 또 늘인다 해도 모자라는 간극은 늘 아쉽기만 해서 직선의 간격은 믿을 수 없으므로
당겼다 놓으면 재빨리 저의 탄력 속으로 숨어버리는 그런 사랑을 갖고 놀은 경험이 있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당겨야만 쓸모가 있는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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