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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윤미 시인 / 칠레에서 온 와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5.

강윤미 시인 / 칠레에서 온 와인

 

 

칠레에서 온 와인을 마신다

혀끝에 긴 맛이 맴돈다

어둠을 만드는 밤의 세포들은 길고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등의 마음은 깊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

난 당신에게 가장 지루한 고백을 한다

긴 침묵 앞에 짧은 안부를

따르는 당신

무료해진 대화로 식탁은 쭉쭉 늘어나고

소시지는 차가워진다

질겨서 더 길게 느껴지는 소시지

 

어쩌면 당신은 긴 안목을 가진 산티아고의 소년일까 당신의 콧등과 나의 속눈썹을 이으면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나이가 같아질지도 모르지 당신이 부르는 돌림노래를 따라 산티아고의 저녁속으로 나는 빠져들지도 몰라 끝을 알 수 없는 골목길을 뛰어가다 마주치는 아이와 꼬리가 잡히지 않는 숨바꼭질을 하는 저녁,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긴 목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만이 가장 길게 빛나는 별자리를 손가락으로 떠먹지

 

와인을 마신다

당신이 선물한 와인상자 속에는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기후가

발효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산티아고의 밤을 이야기한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잔느를 떠올린다

나는 오늘의 맛을 빌려

점점 기울어져 가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유리 속에 비친 칠레는

내가 언젠가 버린 문장의 투명한 호흡

 

우리의 대화를 쏟아버리고

오늘 밤을 마셔버릴 것 같은 자줏빛 그림자

와인잔을 채우고 지나가는 하이힐 소리가

또각거린다 당신을 음미하기엔

너무 멀고 긴 칠레,

그 검붉은 심장

 

<리토피아> 2011년 가을호

 

 


 

 

강윤미 시인 / 입덧

 

 

무거운 시간을 가볍게 걸친 저 고요, 유리관 속 미라는 붕대 속에 이름을 감추고 누워 있다 스스로의 눈빛을 거두고 있다 붕대를 풀면 시간의 속살이 울컥 드러날 것 같은데, 그녀는 어느새 내 몸 속에 들어와 있다

 

새가 먹다 남긴 감을 한 입 문다 그녀는 새의 부리를 따라이곳에 왔을까 내 입술이 살짝 실룩거린다 배꼽조차 봉긋해진다 호기심에도 젖이 돈다 천년을 누워 있던 그녀가 일어나 내 젖을 문다 흔적에선 야생의 맛이 나는 법. 영원히 죽지 않을 구도자처럼 우리는 함께 숲속을 헤맨다 최초의 열매와 시간을 나무 몰래 먹는다

 

그녀가 동굴 속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 나는 그녀 곁에서 돌을 부딪친다 불이살아난다 짐승의 숨을 뜯는다 핏빛으로 더욱 선명한 붉은 입술, 냄새가 동굴을 덥힐 때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이 구분된다 산다는 것이 잠시 목숨처럼 쉬워진다

 

야생을 정복하면 누구나 야생이 된다 내 감정은 천 년을 지우며 걸어온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내 목구멍까지 붕대를 풀며 뒤따라오는 미각의 역사, 나는 냄새마저 잉태한다

 

<리토피아>  2011년 가을호

 

 


 

강윤미 시인

1980년 제주에서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07년 광주일보 문학상 수상.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