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웅 시인 / 풍란(風蘭)
바람을 먹고 산다 하늘을 기어오르다가 바위 벼랑에 떨어져 뿌리를 내렸다 바람의 귀를 가졌고 한번 뱉으면 오래 흩어지지 않는 향기의 말을 갖고 있다 바위에 붙어서 여름과 가을 겨울을 살고 봄 한철은 향기로 떠돌며 산다. 잠들지 못한 파도 소리에 귀가 멀어 물새들 울음소리도 멀리 있다 발을 뻗어도 닿지 않는 뭍 바다는 저 혼자 뒤척이고 하늘을 오르지 못한 목마름으로 모으고 모은 물기로 꽃을 피우는 울릉도 바람 풀 바람의 계절을 산다.
박무웅 시인 / 박쥐
빛보다 어둠이 더 환하다 그는 어둠의 나라에 어두운 길이다 어둠속에서는 어두운 길이 가장 정도(正道)다 늘 떼로 몰려다니면서 한 겹 장막안의 붉은 색깔을 찾아내는 수맥탐지자다 허공이 지상보다 더 단단해지는 처세술을 알고 있다 허공을 자유스럽게 걸어 다니는 내공을 터득한 자의 눈빛이다 낮보다 밤이 더 환하다 어두울수록 더 밝아지는 심안(心眼)을 갖고 있다 박쥐는 밤에 먹이를 잡는다 밤을 찢어 밤의 빨간 속살을 꺼낸다 거꾸로 매달려 허공을 움켜쥐고 지상에 등을 보인다 세상이 싫어 얼굴을 돌린 자의 등은 까맣다 나는 밝은 빛만 좇아다니는 두 눈의 사람이다 캄캄한 어둠에도 너무 밝은 빛에도 눈을 감는 두 발로 엉금엉금 기는 지상의 박쥐다 잠든 등 뒤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검은 병석(病席)을 두려워하는 나는 아침이면 푸드득,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아침의 박쥐다.
박무웅 시인 / 태백 석탄박물관
그곳에 사람들이 살았다 작은 하늘만 보이는 깊은 산중에 한강의 발원지,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었다 돌과 바람을 이웃으로 하는 방 하나 부엌 하나, 낮은 지붕 관사가 있었다 손바닥만한 마당과 변소깐이 있었다 인간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그곳에 삶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삶이 무엇인지 그 사랑 하나로 험한 산과 깊은 강을 건너야 했다 그곳에 가족이 있었다 아들 둘, 딸 하나가 작은 희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곳에 슬픔이 있었다 시커멓게 탄가루를 둘러쓰고 지하 갱도가 개미집같이 뚫려 있는 땅굴 속에서 육체를 소모해서 괭이와 지게로 석탄을 캐어 나르던 광부들이 있었다 연탄을 부수는 아줌마가 있었다 십구공탄을 만드는 나무 해머를 내리치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곳에는 진폐증 환자가 있엇다
그곳에 장인들의 불이 있었다 1970년대 이 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땀과 피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서 흘렸던 눈물이 묻어 있는 광부와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도시의 기찻길로 경적과 증기를 토하며 달리던 석탄열차의 발원지가 그곳에 있었다
박무웅 시인 / 태풍이 불고 간 그 이튿날
태풍이 불고 간 그 이튿날 부러진 몸들의 떨리는 소리를 듣는다 백년쯤 된 소나무들이 부러진 가지와 뿌리들이 금간 목숨을 견디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태풍이 불고 간 그 이튿날 부러진 마음들의 떨리는 소리를 듣는다 육십 평생 키워온 아집이 유리창파편처럼 부서진 추억이 금간 희로애락을 견디고 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힘겨운 버팀목을 하고 있다
아스라한 절벽 바위틈에 엉겨붙은 소나무 몇 그루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것들 조그만 강풍에도 쓰러지는 것들 인간관계의 폐허들 내 마음 속의 길몽과 흉몽들
나는 병든 시간의 바람 속에서 뿌리 깊은 소나무이고 싶지만 죽음의 바람이 불면 내 일생도 날아간다 칠보산 고사목처럼 뿌리가 마른다 나는 어디쯤 서 있는가 내 뿌리는 어떤 세상의 검은 영토에 착지하고 있는가
박무웅 시인 / 황소
어릴 적 우리 집에는 황소 한 마리 하루 종일 나락을 나르고 땔감을 구하러 삼 십리 깊은 산길을 다닌 황소 한 마리
소는 천근만근의 짐을 싣고 걸었고 할아버지는 맨몸으로 회초리만 들고 걸었다
짐을 가득 실은 등은 벌겋게 상처가 나고 벌건 상처 위에 또 짐을 싣고 눈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던 황소 한 마리 어둠이 세상에 골고루 내리고 등의 상처에 간장을 바르면 커다란 눈에 할 말을 모두 담아 여물을 먹던 황소 한 마리
나는 황소처럼 세상에 순종하는 삶이 싫었다 찬바람 극성 대던 외로운 들길에 섰던 어머니가 아프게 떠오른다 잘 사는 친지도 이웃도 나에겐 먼 하늘이었다 바람처럼 밖으로만 떠돌았다 삼거리 길에서 이정표를 찾지 못하거나 들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기쁜 눈길을 주고 웃음을 주었으나 세상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날이면 온몸에 새벽이슬을 바르고 집 근처에 와서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어둠이 나를 일으켰고 어둠이 나를 귀가 시켰다 나는 어둠 속에서 뿔이 아팠던 황소 한 마리
눈 뜨면 허겁지겁 일하는 한 마리 황소인 나를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가장 힘센 황소로 태어나고 싶었으나 이제는 어머니가 국물에 간을 맞추듯 내 삶을 조절해야 하는 시간 외양간의 어둠에 한줄기 햇살이 스며 들여야 하는 시간 열정도 욕심도 내려놓고 세상에 몸을 주어야 하는 숙명을 아는 내 안의 황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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