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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조 시인 / 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5.

고영조 시인 / 암

 

 

암이었다 반군이었다

본시 피를 나눈 동지였다

그들은 교활하고 치밀하였다

그녀가 아이들을 키우고

헌 양말을 꿰맬 동안

몸의 중심에 은밀히 거점을 만들고

城을 쌓았다

그리고 갈대 숲 우거진 붉은 강을 따라

게릴라들이 조금씩

영토를 장악해갔다

공화국에서는 좌우익이

공존할 수 없었다

적과 죽음이 있을 뿐

동지는 없었다

충성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힘을 따라 아군이 되고

적이 되기도 했다

한 줌의 머리칼만 남겼던

긴 내란은 속수무책이었다

응급실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에서

그가 마른장작처럼 풀썩 쓰러질 때

반군들도 일제히 쓰러졌다

싸울 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멸을 택한 것이었다

 

 


 

 

고영조 시인 / 하지정맥류

 

 

 아내는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다 푸른 지렁이들이 종아리를 퍼렇게 감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풀썩 주저앉지 않으려고 바위틈에 뿌리를 깊게 박고 서있었다 너무 오래 서있었다고 몸이 일러 준 것이었다 일전에 갔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둥근 몸이 군데군데 깨어져 있었다 그도 무거운 지붕을 이고 너무 오래 서있었다 한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약사여래께서도 그러하셨다 치맛자락으로 푸른 종아리를 감추시던 어머니도 그러하셨다 떠나신 지 30년이 지났어도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아직도 대문간에 서 계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서 계셨다 푸른 지렁이들이 퍼렇게 감을 때까지 그들은 너무 오래 서있었다

 

시선(2007년 봄호)

 

 


 

 

고영조 시인 / 조장 (鳥葬)

 

 

 한 사내가 독수리떼에 둘러싸여 서있다 제 아비를 맛있게 드시라고 주검을 도끼로 깨뜨려 던져놓고 우두커니 손놓고 서있다 아비의 영혼이 독수리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를 때가지 산중턱에 십년 째 서있다 십년 째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십년 째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사이 아버지도 친구도 한창 나이의 후배도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하늘이거나 극락으로 갔다고 했다 그것이 답이었다 어느 땐가는 어디론가 가야하고 어디엔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걸 보려고 티벳 어딘가 산 중턱에 십년 째 서있다 모든 영혼들이 하늘 높이 날아갈 대 까지 한 장의 사진으로 서있다

 

시선 (2007년 봄호)

 

 


 

 

고영조 시인 / 길과 밭

 

 

 공터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자 철망을 사이에 두고 길과 밭이 생겼습니다 안과 밖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길이 밭이 될 수도 없고 밭이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바깥에서 안을 볼 수도 없고 안에서 바깥을 볼 수도 없습니다 나는 너를 볼 수도 없고 너는 나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당신은 너무 멀리 있어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는 바로 그때 모든 길들은 낯설어지고 그대들은 모두 타인이 되었습니다 바라보면 내 속에 길과 밭이 있고 내 속에 안과 밖이 있습니다 환한 대낮 빈터에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치는 낯선 사내가 있습니다

 

시인시각(2007년 봄호)

 

 


 

고영조 시인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1972년 「어떤 냄새의 서설」을 현대시학에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 1986년 「강에서」「이주 일기」 「그해 봄날」 「떠도는 섬」 등 13편으로 제1회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 시집 「귀현리」 「없어졌다」 「감자를 굽고 싶다」 「고요한 숲」 「언덕 저쪽에 집이 있다」 등이 있으며 그의 시를 작곡한 가곡집 「감자를 굽고 싶다」가 음반으로 출반. 성산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창원 오페라단장, 경남 오페라 단장 역임.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 수상. 성산아트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