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시인 / 술래잡기
고작 열을 세고 우리는 어둠을 뒤지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 느리게 혹은 조금 빠르게 숫자를 세었을 뿐인데 서로 찾고 숨는 사이가 되었다
세상의 미로들도 하나 둘 열까지 세다 보면 엉키고 설켜서 결국엔 입구와 출구가 서로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모든 문들 그 문을 열면 당장 찾아질 것 같은데 어둑해지는 골목마다 아, 모퉁이들은 왜 또 이렇게 많은 걸까
쉽게 찾아지지 않는 우리는 웃음 속으로 숨고 웃는 순간에만 찾아내는 환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경숙 시인 / 물의 근육
숨어있다가 때가 되면 불끈 솟아오르는 근육들 그 투명한 근육을 밟고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를 한낱 미물이라 지칭하겠지만 그 물속 구름을 다 밟고 진창 휘늘어진 초록을 밟고 있어 하늘과 바닥 그 어느 쪽에도 없는 존재인 양 가볍기만 하다
물의 근육이 아름다운 것은 불끈 힘주어 파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돌 하나를 들일 때도 슬쩍 바람이 스쳐 가도 울퉁불퉁 알통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금쟁이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하늘과 바닥을 동시에 밟고 사는 것이다
김경숙 시인 / 발효
발효들은 다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이나 가스 불 없이도 부글부글 잘도 끓어 넘친다 풋것들, 풋내들 쉬이 상하는 것들 푹 끓여서 제풀에 지친 것들 어떤 반론도 없이 촉매도 본질도 다 사라지고 나면 진이 다 빠질 대로 빠져 고스란히 효험만 남는다
저, 초록들 불기 하나 없이 끓는다 한번쯤 검붉게 혹은 샛노랗게 끝을 태워본 적이 있는 것들 끓어 넘친 뒤 긴 방부의 시간에 드는 진액들 진열장에 다소곳하다
그러나 누군가 잡아 흔들면 펑, 제 머리도 날려버리고 마는 영특하고 영악한 발효
김경숙 시인 / 무지개꽃 뜬다
비바람 퍼붓는 폐차장에 지붕 없이 창문도 없이 뒤엉킨 차들이 묵묵히 젖는다
더 젖다가 질퍽한 웅덩이가 생기고 둥둥 무지개 뜬다
한때 속도를 다그치던 엔진 속엔 고요의 계기판이 제로의 속도로 잠들어 있지만 때론 요동치던 힘들도 심심할 때가 있는 것이어서 속도를 놓아버린 연료들 활짝 무지개색을 퍼뜨린다 언감생신 하늘 한 귀퉁이는 엄두도 못 내고 며칠 질퍽하다 마를 웅덩이들을 골라 무지개 꽃 피워놓는다
망가진 것들의 최후가 모두 꽃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저 땅의 깊숙한 곳엔 아직도 검은 원유들 가득해서 꽃들이 달리고 풀들이 달리고 땅에 발 딛는 것들 모두 달려서
빗물이 피워낸 저 꽃을 그냥 믿기로 한다
김경숙 시인 / 애기똥풀꽃
먹은 것이라곤 어미 젖뿐인 애기가 누던 노르스름한 똥
애기똥풀은 저렇게 성성해질 때까지 씹는 것 입에 대지 않고 미지근한 햇살 젖, 요람인 듯 흔들흔들 바람 젖, 까르르, 이슬 젖만 먹고 있었구나
나는 아이도 다 키웠으면서 한참 지난 육아 경력자이면서 손이며 옷이며 온통 똥칠이다 쌉쌀한 냄새 칭얼거린 날이 많아서 여린 속은 이미 쓴맛이 진동하는구나 젖을 쓴맛으로 바꿔 쟁여놓고 노란 꽃으로 배설하고 있는 쓰디쓴 봄날의 애기똥풀
봄이든 가을이든 세상 모든 입들아 쓴맛을 삼키고도 활짝 웃고 서 있는 저 꽃의 속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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