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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 시인(부여) / 꽃의 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6.

이선 시인(부여) / 꽃의 잠

 

 

새벽 운동을 나가다 마주친 꽃

연분홍 몸을 도르르 말고

새벽잠이 곤하다

 

발그레 여명이 드리울 무렵

배시시 눈을 뜨고

수줍어 고개 숙인 채 미소가 환하다

 

밤이 깊어도 어미 생각에

잠 못 이루고 투정하던

다섯 살 손자가 아른거린다

 

―할머니, 꽃도 밤에는 코 자는 거야?

 

 


 

 

이선 시인(부여) / 계단의 곁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가 한창이다. 하루에 두세 번씩 계단을 오르 내린다 뚜벅뚜벅 올라가는데 통통 뛰는 소리 들린다. 앞집 꼬마는 신바람 나고 등에 업힌 가방은 좌우로 흔들거리며 장단을 맞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내렸던가 이십여 년은 보모님의 부축으로 평지를 걷듯 앞만 보고 달렸다 사십여 년은 든든한 곁이 있어 무거운 짐이라도 나누었다 짊어지기에 버거워하지 않고 오르내렸다

 

이제 짐이라는 짐은 다 벗어 버렸다 빈 몸으로 오르내리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터덜터덜 구두 뒤축이 투덜대고 관절은 삐걱삐걱 엄살을 한다  탄력을 잃은 두 다리조차 후들거린다

 

산다는 건 계단의 곁을 세우는 일이다.

 

 


 

이선 시인·수필가

충남 부여 출생. 《창작수필》수필 등단(2001), 《공무원문학》시 등단(2003), 시집『나는 섬이 된다』(2005), 『환한 나이테』(2010), 『사막에는 뼈를 묻지 않았다』 2014), 『계단의 곁』(2018), 『꽃의 잠』(2021), 수필집 『자마이카』(2006), 『사십년 만에 떠난 여행』(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