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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유정 시인 / 가죽나무 그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6.

오유정 시인 / 가죽나무 그늘

 

 

사막을 걷다

토머스 머튼*의 마차를 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단한 여행길

마차가 안내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길가에 옹이 투성이 가죽나무 죽 늘어서

그늘 만들고 원숭이들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마차에 올라 명상에 잠겨있는

그 노인을 보았다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바퀴에 얽힌 열기에 내 생각들

잔뜩 휘말려 있는데

노인이 말없이 내 손 잡았다

무엇이궁금한가

마음을 들킨 내가 밖으로 눈 돌렸을 때

호한새** 한 마리 햇볕 아래 앉아 있었다

벌거벗은 몸이 안타까워

팔을 크게 벌려 손짓했다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 뒷모습에

나의 어리석음이 한 줄기 흔들렸다

무엇을걱정하는가

가죽나무는 긴 그늘 만들며 따라왔고

언제 노인의 손이 따듯해질지 알지 못한 채

나는 깊이 모를 잠에 빠졌다

마차는 쉬지 않고 모래 속을 타박타박 가고 있었다

 

*<장자의 길>을 쓴 서양 신부

**사막에서 산다는 상상의 새

 

 


 

 

오유정 시인 / 시가 그리울 때 나는

 

 

발을 씻는다

찰랑찰랑 물장난 치면

대야의 강물이 부풀어 오른다

문득 잉어 한 마리

내 손을 미끈 스치는 듯하다

대야 둘레에 핀 휘청거리는 물풀,

강가에 이르면

미숙한 행간 흩어지기 시작한다

쓸어모을 겨를도 없이

강물 속 깊이 파고든다

물살에 휩싸인 바위 위로

화석처럼 또박또박 새의 발자국들 새겨져 있다

많이도 닳아진 눈물방울들

부르튼 발에 머물다 간 흔적들 건져 올린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는 물살

잠긴 수도꼭지에서 새는 낙숫물소리

일탈을 부추기는 밤

대야에 잠긴 강물이 다시금 궁금할 즈음

나는 또 강가에 앉아 발을 씻는다

손끝이 머뭇거릴 때

소금쟁이들 발걸음 조용해지면

파문 없는 수면 위로

많은 꽃들 피어난다

꽃잎에 입질하는 어눌한 문자들

내 손이 잉어의 양미간 지나 물살 가르면

비좁은 대야의 강물 더욱 부풀어 오른다

 

 


 

 

오유정 시인 / 따스한 봄날

 

 

노인은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

싹이 트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한다

화단 난간에 비스듬히 앉아

알뿌리들 잠꼬대 듣는다

적당한 햇살과 습기 내리기 시작할

입춘이 언제쯤인가 헤아리며,

맥을 짚어본다

단단한 껍질 속에선

아직 숨소리 고르고, 씨앗들

토닥토닥 4음절 자장가 타고 있다

지루한 오후

손금 따라 수선스런 추억들 지나고

손바닥 촉촉이 젖어든다

훅, 흙내 코끝 스치며

정맥에 푸릇푸릇

새싹이 움트는 중인가

체관에서 나른한 오후 씻어내면

어린아이 하나 문을 밀고

나이테 따라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발자국 따라 음표도 하나씩 태어난다

노인이 눈 속에 빠진 아이를 안아 올리자

꽃술 속에서 여문 씨앗들

늙은 소처럼 어슬렁 기어 나온다

씨앗들,

빛바랜 노인의 손바닥에서

봄날을 되새김하고 있다

 

 


 

오유정 시인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창과 편입학 졸업. 충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문학박사. 2004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푸른집에 머물다』, 에세이집 『소리를 삼킨 그림자처럼』이 있음. 2003년 혜산 박두진 문학작품상 수상.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