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영 시인 / 곡선의 힘
걸어온 길마다 곡선이 선명하네
곡선이란, 숙인 듯 구부린 유연한 은유라서 직설적인 직선처럼 쉽게 부러지는 일은 없지
할머니도 아버지도 저기 둔덕 같은 둥근 봉분 안에 누워 있지 저승에서도 부러지긴 싫어서
헐레벌떡 산 넘어 온 바람도 무덤에 닿으면 둥근 보폭으로 부드럽게 달리지 삘기 꽃 하얗게 간질이며 산 아래 초원을 향해 곡선으로
불현듯 직선으로 치닫던 때가 있었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내 무릎의 흔적으로 알 수 있지
이젠 잘린 시간, 잔해 수북한 그 속엔 지문처럼 새겨진 통곡이 숨어 살지 그건 오랫동안 써 내려온 나의 연대기 중 가장 슬픈 기록
온양으로 나가는 신작로도 동막골이나 소롱골 산밭의 좁은 길도 나의 바다였던 송악저수지 산길도 온통 구불텅한 곡선뿐이었지 강마을 막내고모 산마을 큰고모네도 들길 지나 산길 돌아가는 곡선이었어
이젠 알게 되었지 곡선이 토막토막 끊어진 직선의 울음으로 이어진 것
서주영 시인 / 일력(日曆)
무화과나무 앞에 서면 일력에 꾹꾹 눌러쓴 일생이 보인다
모든 것을 안으로 안으로 묵묵히 담아낸 하루치 울음이 붉은 동그라미로 그려진 늙수레한 엄마가
무화과나무 앞에 서면 뭉툭한 무릎에 덜 아문 상처를 매단 채 버티는 덤덤한 표정이 보인다
가슴을 헤치면 날짜마다 벌건 슬픔으로 차 있는
그래서 無花果는 無火果 안으로 화를 담고도 적막한 시간을 묵묵히 건너온
또한 無花果는 無化果 상처도 눈물도 아예 없었던 일처럼 고요한
시집『나를 디자인하다』2017. 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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