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묽어지는 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5.

황인숙 시인 / 묽어지는 나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황인숙 시인 / 루실

 

 

그녀는 내 언니의

더 언니인 미국인 친구

창문들 쓸쓸한 마을 외곽

묘지 건너에 산다

전에는 없었던 그녀의 새 남편이

나보다 더 수줍어하며

작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아주 젊은 날부터 한번도

둘 이상 일거리를 놓은 적 없던 그녀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은빛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가 들어 있다

전에 그녀가 준 파란색 아이섀도는

아마도 아직 내 서랍에 있지

그녀는 내가 건넨 초콜릿 상자를 만지작거리다

살그머니 탁자에 내려놓고

부엌에 가 브라우니를 가져왔다

그녀가 직접 구운 브라우니는

포슬포슬한 진흙 맛이 났다

그녀도 그녀 남편도

당뇨가 있다고

 

창문 쓸쓸한

묘지 건너 작은 집

그녀가 성큼성큼 오르내리던,

2층 침실로 가는 계단 밑에서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전에 그녀는 기골 장대한 여인이었다

루실, 20년 만에 본

그녀는 내 언니의 미국인 친구

다음에 또 보자는 내 인사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실……

 

 


 

 

황인숙 시인 / 조깅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자명한 산책》《리스본行 야간열차》《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