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시인 / 묽어지는 나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황인숙 시인 / 루실
그녀는 내 언니의 더 언니인 미국인 친구 창문들 쓸쓸한 마을 외곽 묘지 건너에 산다 전에는 없었던 그녀의 새 남편이 나보다 더 수줍어하며 작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아주 젊은 날부터 한번도 둘 이상 일거리를 놓은 적 없던 그녀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은빛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가 들어 있다 전에 그녀가 준 파란색 아이섀도는 아마도 아직 내 서랍에 있지 그녀는 내가 건넨 초콜릿 상자를 만지작거리다 살그머니 탁자에 내려놓고 부엌에 가 브라우니를 가져왔다 그녀가 직접 구운 브라우니는 포슬포슬한 진흙 맛이 났다 그녀도 그녀 남편도 당뇨가 있다고
창문 쓸쓸한 묘지 건너 작은 집 그녀가 성큼성큼 오르내리던, 2층 침실로 가는 계단 밑에서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전에 그녀는 기골 장대한 여인이었다 루실, 20년 만에 본 그녀는 내 언니의 미국인 친구 다음에 또 보자는 내 인사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실……
황인숙 시인 / 조깅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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