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시인 / 씨씨보이*
여자 같은 게 아니고 여자야 바지보다 시스루 스타킹이 어울리는 다리 수염 말고 립스틱이 매력적인 얼굴
교각 위에 올라간 하이힐은 아찔하지 거울을 들여다 봐 거기에 빠져 봐 한해살이 꽃처럼 뿌리가 잘린 발목은 고인 물에서 잘 자라지 잘 썩기도 하고
도대체 뭐가 문제야? 누나가 언니가 되고 형이 오빠가 되는 게 뭐가 끔찍해 나는 내가 더 끔찍한데,
변두리 산부인과에 간 누군가는 남자를 자르고 여자를 낳을 수 없어서 대신 다리 사이에 총을 겨눴대
아버지의 표정은 줄곧 하나였지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여러 개여서 가끔 그게 무척이나 미안한 나는 천 번이나 넘게 다리가 세 개인 척을 했지
거울을 들여다 봐 거울 속에 수장된 수많은 발목을 봐 젖은 발목에서 흐르는 불온한 슬픔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잃어버린 빨간 구두가 자꾸 생각나네 나를 버리고 흘러가버린 빨간 구두
*sissy-boy : 계집애 같은 사내
이미영 시인 / 내 슬픔은 고양이 자세
늑골을 말아 쥐고 숨을 뱉습니다 잔뜩 동글린 등이 안쪽의 급소를 감춥니다 비만은 빠르고 다이어트는 멉니다 사람들은 자꾸 내 인생이 휘었다고 말합니다
치사량의 기대감을 수혈하듯 슬픔을 폭식했습니다 나는 왜 쉽게 슬픔을 허락했을까요 하루에 세 알씩 두통약과 수면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해야 견딜 수 있습니다 아직 갈라진 벽 틈에 숨어있는 몇 인분의 눈빛이 남아있으니까요
들숨보다 날숨이 더 중요한 거라고 모니터 속 날씬한 여자가 말을 하네요 나도 앙큼한 고양이가 될 수 있어 떠난 남자에게도 발톱을 세울 수 있어 릴랙스의 최면이 필요한 밤입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거울 밖에서 본 고양이 자세는 서글픕니다 문득 눈동자에 블랙홀이 생길까 봐 두려워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는 늘 전화기 밖에 있습니다 제발 그 누구도 주사위를 던지거나 거울속을 엿보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어둠 속 이명은 걸핏하면 복식호흡을 하며 아가리를 벌려 나를 삼킵니다
거울은 뒷모습이 없어서 아무리 핥아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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