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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영 시인 / 씨씨보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6.

이미영 시인 / 씨씨보이*

 

 

여자 같은 게 아니고 여자야

바지보다 시스루 스타킹이 어울리는 다리

수염 말고 립스틱이 매력적인 얼굴

 

교각 위에 올라간 하이힐은 아찔하지

거울을 들여다 봐 거기에 빠져 봐

한해살이 꽃처럼 뿌리가 잘린 발목은 고인 물에서 잘 자라지

잘 썩기도 하고

 

도대체 뭐가 문제야?

누나가 언니가 되고 형이 오빠가 되는 게 뭐가 끔찍해

나는 내가 더 끔찍한데,

 

변두리 산부인과에 간 누군가는

남자를 자르고 여자를 낳을 수 없어서

대신 다리 사이에 총을 겨눴대

 

아버지의 표정은 줄곧 하나였지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여러 개여서

가끔 그게 무척이나 미안한 나는

천 번이나 넘게 다리가 세 개인 척을 했지

 

거울을 들여다 봐

거울 속에 수장된 수많은 발목을 봐

젖은 발목에서 흐르는 불온한 슬픔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잃어버린 빨간 구두가 자꾸 생각나네

나를 버리고 흘러가버린 빨간 구두

 

*sissy-boy : 계집애 같은 사내

 

 


 

 

이미영 시인 / 내 슬픔은 고양이 자세

 

 

 늑골을 말아 쥐고 숨을 뱉습니다 잔뜩 동글린 등이 안쪽의 급소를 감춥니다 비만은 빠르고 다이어트는 멉니다 사람들은 자꾸 내 인생이 휘었다고 말합니다

 

 치사량의 기대감을 수혈하듯 슬픔을 폭식했습니다 나는 왜 쉽게 슬픔을 허락했을까요 하루에 세 알씩 두통약과 수면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해야 견딜 수 있습니다 아직 갈라진 벽 틈에 숨어있는 몇 인분의 눈빛이 남아있으니까요

 

 들숨보다 날숨이 더 중요한 거라고 모니터 속 날씬한 여자가 말을 하네요 나도 앙큼한 고양이가 될 수 있어 떠난 남자에게도 발톱을 세울 수 있어 릴랙스의 최면이 필요한 밤입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거울 밖에서 본 고양이 자세는 서글픕니다 문득 눈동자에 블랙홀이 생길까 봐 두려워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는 늘 전화기 밖에 있습니다 제발 그 누구도 주사위를 던지거나 거울속을 엿보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어둠 속 이명은 걸핏하면 복식호흡을 하며 아가리를 벌려 나를 삼킵니다

 

 거울은 뒷모습이 없어서 아무리 핥아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미영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2019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등단. 안정복문학상 은상 수상.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 2020년 경기문화재단 문학-유망, 우수작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