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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순현 시인 / 금방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6.

이순현 시인 / 금방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블라인드의 눈금 사이로

금방이 오고 있을 바깥을 내다본다

 

말들의 덤불 속에

그는 있다

 

얼음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들이 줄줄이 추락한다

 

금방 갈게

 

ㅁ이 녹아내리는 듯

금방은 금방금방 뒤로 밀려나고

 

젖은 샌들에 나비 한 쌍

꿈결인 듯 그늘을 향해 날개를 펼칠 때

빗줄기는 줄기차게 금방의 바닥으로 착지한다

 

각이 진 얼음은 알고 있다

금방은 그와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불빛은 행인들에게 이식되며

인간으로 부활하다 금방금방 스러지고

 

금방, 하나만을 품은 눈이

블라인드를 벌리고 내다본다

 

우주 미아처럼 막막하게

 

-시집 『있다는 토끼 흰 토끼』

 

 


 

 

이순현 시인 / 꽃을 든 지구

 

 

어느 순간 발견한다

잘 죽기 위해서라는

오래전부터 간직해오던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 시간에도 지구는

꽃을 들고 우주 공간으로 나아간다

나아가는 그곳에는 거대한 거품이 살고 있고

 

실외기 위에 쌀 한 줌을 뿌려둔다

화면을 켜고 미니재봉틀과 커튼 원단을 검색한다

 

꽃피는 곳을

어디엔가는 늘 마련해 두고 있는 지구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건 몸의 한끝이

지구가 닿을 수 없는 너머까지 가 있다는 거지

몸의 극지에도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이지

 

꽃 뒤에는 노래들이 이어지고

혀 밑에는 씨방이 여물어간다

 

이번 구간 수십 년은 나로 사람으로

다음 생의 구간에는 아마

당신의 손에 들린 용담 꽃다발이 되겠지

 

꽃 피는 자리마다 꿀이 샘솟고

쇄골 밑의 뼈가 조금씩 어긋난다

내 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륙이 많아서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

실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 잎이 떨어진다

나는 잎이 떨어진 자리를 정토라 부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감정들이 머물다가도

흉터 하나 남지 않는 거울

은막 뒤로 사라진 내 얼굴들은 지구를 벗어났을까

 

어둑해지는 시간을 난간 바깥으로 쓸어내며

없는 태양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당신이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고 믿을 뻔하였다

 

 


 

 

이순현 시인 / 걷는 사람

 

 

아름다움은 어떻게

나의 내부로 흘러드는가

 

입은 하나의 열쇠구멍

세계의 비밀을 지니고 간다

 

검은 건반 흰 건반

입김을 불며

거리를 횡단하는 사람들

하얀 숨결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공기의 행보가 자유롭다

 

화상이 살 속으로 꼬리까지 파고들 듯

비밀에 덴 노래는 허공으로 파고든다

 

심장도 하나

노래도 한 올

 

발가락이 카리키는방향은

죽은 듯이 꿈이 기다리는 곳

노래는 허공으로 외줄을 타고 간다

실이 뽑혀 나오듯 심장이 풀려나오고

 

노래가 다 빠져나간 심장은

소금기둥이거나 백지이거나

 

내 눈은 내 눈을 볼 수 없고

보이는 것은 죄다 눈 속으로 들어와

내 눈이 된다

 

지금을 횡단하는 춤

보폭이 자유로운 하얀 숨결

모든 입술의 노래를 안으로 옮겨 심는다

 

 


 

 

이순현 시인 / 수 없는 사막

 

 

금요특선 실크로드 탐사

방영 중인 사막을 사는 어머니,

잠든 머리맡에 물그릇이 놓여 있다

황사바람은 어머니의 산을 옮긴다

강은 모래사막 가운데서 사라지고

뜨거운 바람이 강을 메우며 흐른다

수맥을 잃은 어머니는 탄다

잠꼬대 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다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뱉으며

반경 수천 킬로의 잠을 헤치고

잠의 바깥 형광등 불빛 속을 휘젓는다

머리맡을 더듬는다

손에 잡히는 물그릇

바닥에는 불은 밥알이 가라앉아 일렁인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수심이 점점 낮아진다

타클라마칸에서 사라진 호수바닥의 소금처럼

남은 밥알이 새하얗게 반짝인다

소금을 걷어내고 파 내려간다

지층 깊은 곳에서 발굴되는

마포에 싸인 미이라,

머리맡의 바구니에는 사자밥이 그대로 놓여 있어

썩지도 못한 아이가 이승으로 건너온다

숨을 몰아쉬며 돌아눕는 어머니,

십 수년 전에 죽은 동생을 끌어안는다

실크로도 탐사 특집방송

모래사막은 브라운관 안에서 황량하고

늘 한 벽을 향해 쪼그리고 잠드는

어머니의 사막,

끌 수도 채널을 돌릴 수도 없다

 

 


 

이순현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몸이 유적이다』(문학동네, 2002), 『있다는 토끼 흰 토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