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시인 / 더딘 사랑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이정록 시인 / 정말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 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 했거든
월산 뒷 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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