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숙 시인 / 언어라는 육체
나는 나를 모른다. 내 육체는 나를 모른다. 나는 물이 되고 싶다. 나는 언어가 되고 싶다. 내 육체가 백지 위를 흐른다. 내 정신이 백지 위를 흐른다. 흐르는 것들은 만날 수 없다. 막을 수 없다. 흐르는 것들은 과거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과거는 없다. 오로지 흐르는 육체, 흐르는 시간뿐이다. 당신이 수요일이라고 말할 때 나는 먼 별빛을 기웃거린다. 당신이 머리에 젤을 바를 때 나는 겔 상태로 헤헤거린다. 내가 물결이 될 수 있을까 너를 모르듯이 내 육체가 백지 위를 흐른다. 내 정신이 백지 위를 지그재그 흐른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 육체의 물결. 누구도 풀 수 없는 이 정신의 올무. 옹알이를 할 때부터 혀로 익혔던 말들의 감각. 내가 세계에 내뱉은 첫 마디가 어제도 오늘도 백지 위를 흐른다. 네가 나를 모르듯이 나는 너를 모른다. 알 듯 말 듯 한 거울 속의 나, 뚱뚱하고 삐쩍 마르고 수척한 수많은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갸우뚱하면서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한다. 정지하는 것들은 앞을 보면서도 뒤만 생각한다. 이대로 바위가 될 순 없을까 너희들이 일요일의 소풍을 즐길 때 나는 안식일의 허공을 더듬는다. 딱딱한 너희들의 마음이 내 육체 위를 흐른다. 그것은 물이 아니다. 물을 가장한 돌멩이다. 죄를 지은 더러운 손으로 또 다른 죄인을 향해 던지는 교만의 돌멩이다. 누가 우리들의 죄를, 우리들의 사랑을 정죄할 수 있을까 흐르지 않는 자들은 백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흐르는 것들은 백지를 사랑한다. 백지가 하얗다고 말하는 자는 백지의 마음을 모르는 자.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우기는 자. 백지 위를 흘러내리는 것들이 죄를 만들고 십자가를 만들고 죽음을 만든다. 흐르는 육체 위에, 흐르는 정신 위에, 흐르는 백지 위에 써나가는 나의 언어는 순간과 영원을 함께 산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알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라고 묻는 자에게 왜 왜냐고 묻지 말자. 우리는 이유 없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유 없이 죽어야 한다. 네가 나를 용서하듯이 내가 나를 용서할 순 없을까 나를 용서하기 위하여 내 육체에 언어를 써나간다. 그러나 내 육체의 언어를 나는 읽을 수 없다. 내가 쓴 언어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언어라는 육체를 살 뿐이다. 탄생을 기억할 수 없듯이 나의 언어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육체가 무겁다. 내 언어가 무섭다. 이 무거운 언어라는 육체가, 이 무서운 육체라는 언어가,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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