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은 시인 / 루벤 크루이드투인 식물원
서우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에요 오리에게 안녕 오리걸음으로 빨간 공을 굴리며 노는 서우 집에서 2킬로미터 밖으로는 나갈 수 없대요 경찰관 아저씨가 사람들을 지키고 놀이터 쇠문은 잠겨 있고 놀이기구는 쉿, 접근금지래요 벤치의 노란 경고 앞에 서우는 앉을 수 없어 무당벌레 한 마리가 앉을까 말까 루벤 크루이드투인 식물원 오래된 물가 서우는 세 살 공을 굴리며 노래를 불러요 살금살금 커져라 꼭꼭 숨어라 깡충깡충 뛰어라 빨간 공 검은 점과 무당벌레는 서로 닮고 커다란 공 안에 갇힌 사람들 아우성 숙주의 입을 막아버린 covid-19 오리가 흘러가고 오리걸음 걷던 서우가 공을 깔고 앉아 노래 불러요 깡충깡충 뛰어라 꼭꼭 숨어라 둥글둥글 기어라 민들레 씨앗들이 날아가요 저녁 8시 집집마다 박수치는 소리 균과의 전쟁, 인간보다 더 먼저 태어난 바늘에 찔린 딱정벌레 습격도 시작될지 몰라요 산 피에르 성당 종소리 울려요 무서워 까마귀 울음소리 들려요 더 무서워 겁 많은 서우가 엉금엉금 아빠 어깨 위로 올라가요
김명은 시인 / 백야
어둠이 없으면 추측도 없다 구름은 빛 없는 낮을 어디서 찾을까
스님이 앳된 여자 질문자에게 자기라고 한다 질문자와 청중들은 웃고 박수를 친다 자기라는 말은 쉽고 깨지기 쉬운 말
공분보다는 자학에 익숙해진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별반 다름없는 걸음 걸핏하면 모서리에 이마를 찍힌다 찍힌 곳 또 찍힌다 외로움을 잊는다 기진하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싸워라 싸워야 큰다 이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더라 진흙탕에서 놀던 어린아이 작은 발자국들 흙 묻은 맨발들이 어스름을 지나간다
뜬눈으로 죽음쪽에 가까워진다 내가 나를 만질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은 형벌이다
사람들이 돌멩이를 줍는다 물수제비를 뜬다 돌멩이는 언제든지 나에게 날아올 태세
다시 낮은 온도에서 자기라는 말을 굽는다 하얀 어둠 속에 질문하는 이도 없고 청중도 없다
김명은 시인 / 나도 모른다
우리 몸의 세포 수를 아십니까 세포 하나의 길이를 아십니까 한 해 임산부가 먹는 사과의 개수를 아십니까 쇼처럼 보이는 토마토 축제에서 가장 멀리 던져진 토마토를 아십니까 붉은 플라스틱 컵과 그 속에 꽂힌 붉은 빨대의 성관계를 아십니까 꽃이 필 때까지 색깔을 알 수 없는 꽃을 아십니까 달리고 싶은 기차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수를 아십니까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글씨체를 아십니까 사자를 묶을 수 있는 거미줄의 강도를 아십니까 한반도 비핵화 유혼과 종북몰이의 새로운 희망을 아십니까 태변에서 지금까지 눈 당신 똥의 분량을 아십니까 고무젖꼭지를 빠는 찌찌파티를 아십니까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 머리를 통째로 입에 넣고 있는 들쥐를 아십니까 뉴욕 월스트리트에 살고 있는 황소와 곰의 관계를 아십니까 직장에서 직장으로 직장을 옮겨도 즐겁지 않은 비정규직 신입 사원의 찢어진 이력서가 몇 장인지 아십니까 팔을 이마에 얹고 눈을 뜨지 않는 딸의 슬픔을 아십니까 방금 부러진 분필의 목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알을 낳다 죽은 금화조의 다음 생을 아십니까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사목의 구원을 아십니까 먹구름의 생간을 빼먹는 난폭한 바람의 식욕을 아십니까 갓 태어난 아기 뺨에 부족의 흔적을 새기고 겨우 일어나 걸으려는 아이의 뺨을 면도칼로 그은 남자들을 아십니까 당신은 흉터의 미소와 보조개의 냉소를 구분할 줄 아십니까 겨울 내내 얼어 있는 산그늘의 온도와 다시 거리로 나온 촛불의 온도를 아십니까
김명은 시인 / 완벽한 잠
반쯤 벗겨진 아랫도리 며칠 불면증에 시달려 너덜너덜 해진 거리 버스 몇 대가 성당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 옆, 그림자를 뉘고 잠든 여자 버스에서 내리던 여자들이 그 검은 구멍을 피해 달아난다 헤벌어진 입
군데군데 썩은 치아 사이에 고요한 한 세계가 숨어 있다 깊은 동굴로 들어가고 있는 꿈이 평온하다 축축한 곳 그늘보다 깊고 어둡다
그녀는 잠든 척 눈을 감고 그 실눈으로 세상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고 있을지 모른다 까맣게 모여든 파리 떼들 가늘게 내려쌓인 햇살 가닥가닥 낮잠을 파고드는 기억을 헤집어서 내게 불면의 손을 뻗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그녀의 잠 속으로 끼여들 수 없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노르스름한 꿈이 익어간다 길바닥에 누운 저 달콤한 낮잠 거긴 안으로 잠긴 그녀의 완벽한 방이다
등나무 아래 모로 누워 몸을 뒤척이던 낙엽들 신호대기 중인 사람들을 빗금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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