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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명수 시인 / 몸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3.

이명수 시인 / 몸살

 

 

강정마을 근처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뒤집히는 바다를 본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와 곁에 앉는다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세요

전국적으로 다 아파

 

누구에게나 몸이 지구다,

지구가 아프면 몸도 아프다

에티오피아가 아프다,

탈북 난민이 아프다,

후쿠시마가 아프다

강정마을,

구럼비가 아프다

 

전국에 강풍특보가 내려진다,

으슬으슬 봄바람 먹은 내가 아프다

때를 아는 꽃몸살이다

그래,

아프지 않게 오는 봄날이 있더냐

 

이명수(시와 시, 2012가을호/ 2013 오늘의 좋은 시)

 

 


 

 

이명수 시인 / 겨울밤

 

 

노모는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있다

나는 옆방에서

문을 반쯤 열어놓고 귀도 반쯤 열어놓고 잔다

흐린 정신이 밤에 돌아오시나 보다

새벽녘에 밥을 찾고 물을 찾는다

나도 새벽에 밥을 좀 먹고 물을 마신다

그러다 노모 곁에서 연필을 깎아

시를 쓴다 시를 지운다

나도 밤에 정신이 돌아오나 보다

정신의 끈을 잡고

노모와 동행하는 밤

참 멀다

 

 


 

 

이명수 시인 / 꿩꿩 장서방

 

 

나이 백다섯 된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여든 다섯 아드님과 여든 넷 며느님이 상주. 목회자인 장손자와 신도들이 둘러앉아 추도 예배 중인데, 뜬금없이 상주 며느님이 벌떡 일어나 웬 노래를 불러댑니다.

"꿩꿩 장서방 무얼 먹고 사나."

좌중은 한바탕 웃음판이 되고, 아드님이 안절부절하는 게 보기에 민망했으나 호상에 흉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속사정이 궁금했지요.

 

백다섯의 시어머님은 돌아가기 전까지 여든 넷 며느님의 치매수발을 드셨다 합니다.

며느님이 기억의 끈을 놓지 않게 매일같이 찬송가를 부르셨는데, 치매 오기 전까지 함께 불렀던 찬송가는 깡그리 잊고, 어린 시절 동무들과 불렀던 놀이 노래를 기억해 냈다는 겁니다.

치매가 가까운 과거부터 차례로 지워나가 마침내 어렸을 적 먼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서 목도하니 어안이 벙벙했어요.

"꿩꿩 장서방 무얼 먹고 사나."

당신이 떠나기 전, 며느님이 어린 시절 기억만이라도 꼭 잡고 있으라고 매일같이 이 구전동요를 함께 불렀던 영정 속 저 시어머님이 참 장한 장서방이 아니겠습니까.

 

날 저물어 시어머님은 하늘나라로, 며느님은 어린 날로 돌아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꿩꿩 장서방 무얼 먹고 사나."

 

 


 

이명수 시인

1945년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 공주사대 국어교육과와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5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공한지』, 『흔들리는 도시에 밤이 내리고』, 『등을 돌리면 그리운 날들』, 『왕촌일기』, 『울기 좋은 곳을 안다』와 시선집 『백수광인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음. 현재 현재 한국시인협회 이사, 충남시인협회 회장. 계간 《詩로 여는 세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