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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령 시인 / 빛의 자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3.

김미령 시인 / 빛의 자각

 

 

이것은 개

납작하고 네모난 이것은 접어지지 않는 개

공중을 향해 한참을 짖어 내장이 투명해진 개

빙그르르 굴러가다 제자리로 돌아온

누구도 찌르지 못하고 옆으로 누운 원뿔 개

하나의 부조리를 완성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멈추지 않는 개

눈앞에 떠 있는 빛 뭉치의 무한한 변형을 무심히 보고 있는 개

거리를 가로지르지 않고 자기 안을 갈라 가로수가 양쪽으로 높이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개

차원의 내부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순간적인 정지에 귀를 쫑긋 세우는 개

 

경로는 어디에나 썩은 음식 냄새를 흘리고 붉은 소화전이 있는 골목 입구에 한 명의 잠입자를 감추는데

광고 트럭이 연달아 지나고 꽃가루가 흩날리고 눈발이 낱낱의 알갱이로 몰아쳐 내리는 오후

 

퍼레이드는 퍼레이드다* 퍼레이드는 안구 속의 퍼레이드고 길가의 구경하던 소녀가 영원처럼 쓰러지는 중

 

신호등이 흑백으로 점멸하는 사거리

마음의 모든 길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풍경 속

공중에 날리는 털을 천천히 씹으며

 

보이지 않는 개의 잠 뒤에서

 

* 퍼레이드는 퍼레이드다 : 고다르의 다큐 〈머나먼 베트남〉에서.

 

 


 

 

김미령 시인 / 오메가들이 운집한 이상한 거리의 겨울

 

 

 겨울점퍼, 모자 달린 겨울점퍼, 모자에 털 달린 겨울점퍼, 모자에 굶주린 들짐승이 달린 겨울점퍼, 털 테두리 안의 까만 얼굴, 암컷 테두리를 감은 까만 얼굴, 수컷 테두리를 두르고 암컷 테두리들에 둘러싸인 까만 얼굴, 테두리가 풍성할수록 까만 얼굴이 잘 메워지고, 뿌연 하늘에 굵은 눈발이 몰아치고, 얼굴은 동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겨울을 기다렸어요, 우리는 계절적 인간이니까, 언제나처럼 커다란 동그라미를 공중에 그렸어요, 선천적으로 우리는 견디는 것을 숭배하니까, 동그라미들이 모여서 일제히 어디론가 향한다, 더 깊은 동굴을 향한다, 동그라미들이 겹친다, 화재경보기 옆에서 키스를 한다, 정류장에 한 줄로 서서 동그라미를 뻐끔뻐끔 내쉰다, 우리들의 이글루, 이글루를 무덤처럼 목 위에 달고, 얼굴들은, 거리에 서서 겨울잠을 자는 얼굴들은

 

 


 

 

김미령 시인 / 건너가는 목소리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소프라노로 물었습니다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당신은 스푼을 떨어뜨립니다 노래하듯이 인사했을 뿐인데

 

누구의 호기심에도 들르지 않고 그 말은 곧장 날아갑니다

 

죄송합니다 가성으로 사과합니다 가성으로 웃다가 가성으로 멈춥니다

 

그건 첫 번째 내 목소리에 화답하는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목소리에게 가족을 찾아 주는 일입

니다 들뜬 기분으로 실례하거나

춤추듯이

애도하는 것

 

뾰족한 발끝으로 테라스 위를 걷듯이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목소리는 인사를 잘합니다

공손한 공기처럼

성대 안에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처럼

 

입 밖으로 도르르 풀려나가는 리본이 있습니다 입속에 품고 있던 작은 새들을 풀어놓은 것 같습

니다

 

그것으로 한동안 끝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한 말인가 하고 당신이 생각할 때

그것은 이미 거기에 없습니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건네줍니다 장소가 드문드문 생겨나다가 사라집니다 예사롭지 않은 울음소

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흔한 일입니다

 

귀를 잠시 겨울의 지붕 위로 데려가는 것은

 

 


 

 

김미령 시인 / 캉캉

 

 

두꺼운 장막, 열 겹의 주름 밖에 내가 서 있다

파도치는 거리, 언젠가 이 바깥을 모두 걸을 때 너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도는 것을 멈출 수 없고

멈추는 방법을 우리는 모르고

 

너의 음흉이 나의 어리석음을 칭칭 감으며 비대해진 솜사탕처럼

 

치마를 벗기면 너는 얼마나 줄어들까 주름을 쫙 펴면 얼마나 넓어질까 도열한 풀들이 빽빽하게

막아선 것 잠깐 나왔다 들어가며 숨바꼭질하는 것 누르면 까르르 웃기만 하는 아이가 들어 있고

뉘여 말리면 비쩍 마른 엉덩이들이 뿔뿔이 달아난다

무릎 위로 일렁이는 흰 건반들

밤새 입안에 쇠붙이가 많이 쌓이고 새를 날린 아침 나무처럼 너는 헐렁해져서

 

 


 

김미령 시인

1975년 부산 출생. 부경대 국문학과.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파도의 새로운 양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