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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승유 시인 / 윤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3.

임승유 시인 / 윤달

 

 

손톱을 깎으면 그늘이 밀려와요 자라나는 것들은 그늘을 거느리죠 눈 밑에 손톱 밑에 지구의 허기 밑에 달은 베어 먹기에 좋고 당신 뒤에는 내가 있어요

 

거기 식물처럼 길어지는 마음을 가진 아가씨 당신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알아요 당신이 접어서 상자속에 넣어둔 일들은 그대로 이루어질 테니

 

초콜릿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후회했어요 나는 왜 치즈케이크를 먹지 않은 거지 물이 없었다면

 

바다가 없었다면 염소가 없었다면 공장장이 없었다면 아버지나 디제이가 없었다면

 

당신에 대해 뒤에서 말할 때 양팔이 생겨나요 숲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는 숲 전체가 이동하는 중이죠 식물들의 발바닥이 찍히고 있는 중이죠 당신은 저만큼 가고 있고 케이크를 떠먹을 때마다 달콤한 스푼은 밀러오고

 

그러니 아가씨여

 

마음에 품고 있는 걸 말하지 마요 그대로 다 이루어질 테니

 

 


 

 

임승유 시인 / 어둠을 밝히는 불빛

 

 

저녁으로 뭘 해 먹으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다가 저녁은 일몰을 구경한 후에 먹기로 하고

 

슬리퍼를 끌고

 

바다로 나가기로 한 우리는 조금 전에 이곳에 다 모였다. 여름이라서 다들 맨발이라는 것만 빼면 하나로 묶일 만한 공통점이 없었는데도

 

슬리퍼를 끌고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는 제법 그럴듯했다. 모두가 바다로 가서 일몰 구경을 했는지는 끝까지 안 가봐서

 

확실하지 않지만

 

돌아와 저녁을 먹을 무렵에는 마당의 어둠을 밝히는 불빛만큼이나 분명하게 짚이는 게 있었다.

 

 


 

 

임승유 시인 / 문법

 

 

눈을 뜨니

 

풀밭이 펼쳐졌다. 펼쳐지는 풀밭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가 멈춘 것처럼 꽃이 있었다. 예쁘다고 말하면 뭐가 더 있을 것처럼 예뻤다.

 

뒤로 물러나면 더 많이 보이고 많이 봐서 끝이 보일 때

 

뭐가 있어?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네가 물었고 뭐가 있다고 하면 끝이 안 나는 풀밭이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까지 따라오는 풀밭이었다. 빛이 부족해지면 풍경은 생기다 말았다는 듯 풀이 죽었고

 

그만 해

 

그런 말은 풀을 뜯어내고 남은 말에 가까웠다.

 

 


 

 

임승유 시인 / 하고 난 뒤의 산책

 

 

너는 거기에 가자고 한다

 

거기라면 수령이 백 년도 더 되는 나무가 있다는 곳 손바닥만 한 잎사귀들이 손바닥만 한 하늘을 가린다는 곳 보이지 않는 너를 찾아 백 년도 넘게 뛰어 다닌 적이 있다

 

울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너는 뭔가 투명하고 징그러운 걸 만지고 있었다 생태 학습장 앞에서

 

너는 물갈퀴니

웅덩이보다 깊은 웅덩이니

 

웅덩이는 웅덩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흘러내리고 남은 게 우리라서 우린 조금 부족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자면서 하는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영원히 자게 될지도 몰라

 

그곳으로 가는 길가의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놓았다

 

 


 

 

임승유 시인 /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저기 대문을 잠가줘요

 

말랑하고 빨갛고 냄새가 나고 손으로 문대면 으깨지는 산딸기의 성장이 두려워 산딸기를 씹어 먹었다 내 이빨과 혀가 나의 성장에 관여했다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 않고 웃었다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들어올 때는 불을 끄고

방문을 반쯤 열어줘

 

어디서나 짙푸른 멍처럼 풀들이 자라나고

잇몸이 가려우면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아버지만 뜯어 먹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니

성장이 징그러워요

 

입을 작게 벌리고도 훌륭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메뚜기도 괜찮고 개구리도 괜찮고 방아깨비는 좀더 우아하지

쇠죽솥 가득 우아하게 저녁을 삶고 있는 엄마

나는 잘 크고 있다

 

아버지의 입안에서 맴돌던 냄새가

내 입안에서 맡아진다

자꾸만 내 이빨이 무시무시해진다

 

 


 

임승유 시인

1973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2011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김준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