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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리 시인 / 바람 불고 고요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3.

김명리 시인 / 바람 불고 고요한

 

 

죽은 줄 알고 베어내려던

마당의 모과나무에

어느 날인가부터 연둣빛 어른거린다

얼마나 먼 곳에서 걸어왔는지

잎새들 초록으로 건너가는 동안

꽃 한 송이 내보이지 않는다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

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적막이 또 한 채 늘었어요

 

이대로 죽음이 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바람 불고 고요한 봄 마당

 

 


 

 

김명리 시인 / 시학(詩學)

 

 

아침놀이 번지는 꽃밭 봄 마당의 꽃들 중에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피는 꽃,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듯이 피는 꽃도 있다

 

꽃샘바람 잎샘바람 이제는 다 물러난 것 같은

오월 해당화 붉은 꽃등 곁에

 

팔순의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가물가물

분홍 물살 이는데

 

울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오래오래 허공을 쓸어내리다가

잠잠히

어둠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피는 꽃도 있다

 

< 시인수첩 >2011년 가을호

 

 


 

김명리 시인

1959년 대구에서 출생.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집으로 『물 속의 아틀라스』(고려원, 1989), 『물보다 낮은 집』(미학사, 1991), 『적멸의 즐거움』(문학동네, 1999), 『불멸의 섬이 여기 있다』(문학과지성사, 2002), 『제비꽃 꽃잎 속』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