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빈 시인 / 대추나무 여자
대추나무집으로 이사하던 날 꽃샘바람 부는 뜰에 다소곳하게 서 있던 여자 늦도록 겨울잠을 자던 여자 드디어 한 사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까 연둣물이 들고 엷은 손들이 벙싯 입을 벌리고 머리 어깨 무릎으로 노래를 하고 헤실헤실 웃으며 연신 귓속말하던 여자 지하 방에 꺼진 꽁초 뒹굴고 사내는 공원을 서성이거나 산으로 출근을 하고 온종일 노점에 쭈그려 바지락 팔던 여자 단단한 삶의 껍질 벗겨 등 굽은 사내의 따끈한 국밥이 되던 여자 몽실한 솜털목도리 같던 여자 불룩해진 배를 앞치마로 감싸며 햇살 같은 아이들 다산하던 여자 가뭄의 시간들에도 자식의 희망을 싸안고 있는 여자 속내와 땀내가 나에게 흐드러진 가지 늘어뜨려 몸풀고 있다
박수빈 시인 / 순두부
시장에서 사람들에 부대껴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고 계란이 깨지고 판두부가 깨졌다
상처를 문지른 손으로 마저 으깨 순두부찌개를 만든 저녁밥상은 뭉클 멍울진 속이 풀어지게 했다 으스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디었을까
칼질 필요 없이 불편한 심기 말랑해지니 이미 지닌 순두부의 외유내강
부드러움에서 힘이 나온다
질근질근 씹지 않아도 목 넘김이 좋아 잠드는 칼날선 일들
말랑한 카리스마의 밤 내가 고요히 잠든다
박수빈 시인 / 원고지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명신 시인 / 봄이 꽃을 피우는 것은 당연한가 (0) | 2022.04.13 |
---|---|
임승유 시인 / 윤달 외 4편 (0) | 2022.04.13 |
김미령 시인 / 빛의 자각 외 3편 (0) | 2022.04.13 |
김명리 시인 / 바람 불고 고요한 외 1편 (0) | 2022.04.13 |
이명수 시인 / 몸살 외 2편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