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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현 시인 / 클리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4.

김재현 시인 / 클리셰

 

 

배우들에게 사랑을 들으려 할 때

그들의 육체는 젊고 아름답다 나는 노트에

"꽃"이라 쓰고

헐겁고 여린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쥐었던 처음을 생각한다

 

배우들에게 사랑을 말하려 할 때

무대의 그늘은 풍성하고 싱그러우며

말들의 갈기는 건강한 윤기로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오줌 냄새가 나는 벨벳 의자에 앉아

영사기가 토해내는

뿌연 빛무리의 슬픔을 그리는 수밖에 없다

 

배우들처럼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그 때의 사랑은, 내가 배우들이 나누는

사랑을 훔쳐보며 후회하는 것

많은 것을 놓쳤던 억센 손가락 사이로

둥지를 틀던 여린 제비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고 푹신푹신한 팝콘 속으로,

흐드러진 메밀밭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겹쳐졌을 때

 

갈기 없이 말로 달리는 것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 우리를 보며

환호하는 것

고개를 돌리고 빙긋하자,

네가

싱긋하는 것

 

문학신문 『뉴스페이퍼』 2020년 4월 발표

 

 


 

 

김재현 시인 / 손톱 깎는 날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김재현 시인

1989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경희대학 국문과 졸업.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현재 SBS 드라마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