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현 시인 / 남애
내가 좋아하지만 내 것은 아닌 동해안의 작은 항구 남애 잘 늘 있겠지 파도는 모르는 가슴에서 잠들 것이고 항구 가까이 떠있는 고깃배는 거친 사랑으로 일렁이겠지 남애가 서핑 장소로 변했다면서 막말을 섞으며 서운해하는 후배의 구석진 순심을 귓등으로 흘린다 애끼는 건 왜 다 이 모양이 되어 남의 애를 태우는지 어디 이름이나 불러보자 남애
박세현 시인 / 태백선
정선 여량 구절리 방면과 사북 고한 황지 철암 방면은 청량리발 태백선 밤기차가 닿는 새벽 두시 이십팔분 증산역에서 나뉘어져 각자 제 갈길을 간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쿨럭거리는 노인의 기침 소리와 뼈가 시린 새벽 공기와 빈 병이 서로에게 부딪히는 공허한 소리와 나이 사십에 환갑으로 보이는 사내가 뱉어내는 검은 가래와 집 없는 사내와 바리바리 짐보퉁이를 끌어안고 조는 쉰줄의 아낙과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하급 관리의 초라한 권위와 기차에서 내리면 곧장 갈길이 없어지는 젊은 여자가 태백선 통일호 열차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세현 시인 / 경주를 떠올리는 방식
우리는 불바다가 돼도 좋단 말입니까? (그럼 삼겹 굽겠다는 겨?)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에 나오는 동북아 전문가 박교수의 대사다 그 인간이 나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장면을 자축하듯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빈 극장의 몇달치 침묵을 털어내던 나의 웃음소리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나 말고도 두 명 더 있었으니 강원도에서는 이 정도면 만땅) 아무도 모르게 클클 웃어보려던 꿈은 옆 좌석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밤 허공에 둥글게 떠 있던 왕릉이 여인의 젖가슴 같다는 상상은 하나마나한 말이겠으나 영화를 보신 분들은 나의 이 피상성을 너그럽게 넘어가 줄 것이다 누군들 저 속으로 입궁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침 여덟 시 사십오 분 롯데시네마, 원주 몸이 덜 깬 7월의 어느 날 두 시간 정도 얌전히 앉아서 경주를 관람했다 삶은 말이다 (빨랑 말씀하세요!) 이렇게 제각각 간절한 춘화를 찾아나서는 독립영화에 다름 아니겠지
박세현 시인 / 극적인 밤
한 통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 다들 어디서 뭐하는 거지? 열 내며 사는 일도 심드렁해 각자 면벽공사에 성공하고 있단 말씀인가 영하 몇 도의 창밖으로 테너 색소폰 성대(聲帶)에 흐릿하게 얼어붙은 재즈 가락이 저음으로 밤을 끌고 가는 소리 들으면서 간신히 쓸쓸함에 성공하는 밤 베토벤 심포니 5번에도 연주되지 못하고 남는 악보가 있을 것이다 낡은 오디오도 용량 이상으로 발광할 때가 있다
박세현 시인 / 아름다운 것들아
러시아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은 독한 아름다움에 관한 연주이자 순수한 슬픔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러시아식 번역이다
어떻게 해도 번역되지 않는 것들아 그러나 아름답고 쓸쓸한 조각들아 내가 네게로 가서 너의 몸이 될 것이다
박세현 시인 / 본의 아니게
망상 해변이 늦된 철학개론서의 번안 같았습니다 아무도 못 보는 사이 잔파도 몇 소소롭게 부서지는 거 보았습니다 -나, 무사합니까? -그 연세에 무사해서 뭣 혀? 수평선 흐트러질까봐 조심히 떠 있는 화물선 한 척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몸 가누듯이 겨우 정신 붙들고 내 곁으로 오는 거 생각 없이 그냥 보게 됩니다 배는 내 배에다 짐 부려놓고 등 뒤로 흘러갔을 겁니다 망상 해변에 서서 이 모든 상황 속에 본의 아니게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이 시는 그 상황에 담기지 못하고 뭉개져 흘러나온 물건일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날 빗방울도 몇 점 떨어졌습니다
박세현 시인 / 나는 내가 아니다
사랑해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거니? 너는 무슨 권리로 나를 사랑한다는 거니? 너가 그딴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울고 싶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인연이다 나는 네 속의 뻥 뚫린 구멍이다 사랑한다는 말만 삼가다오 나도 너를 사랑하고 싶어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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