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 시인 / 초록의 은유
시멘트길 갈라진 틈새의 키 작은 초록을 보면, 쏟아지는 빗물로 몸을 씻고 있는 등 굽은 노숙을 보면, 문득 발길 멈추고 우산을 씌워주고 싶다 발길에 연신 짓밟히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믿기지 않아 그의 이름 모르는 게 마냥 미안해진다 초록은 생활력이 저리 강할까 민초는 가혹하거나 안전하거나 힘껏 푸르게 살아가는 등이 있다 지붕이 없는 집에 가까스로 세든 세입자들 초록은 시멘트길이 제 배를 갈라 기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은유이다
정미 시인 / 오래전 죽었거나 아직 죽지 않은 시간의 활촉들
누가 빗물 속에 활을 쟁여 놓은 걸까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는 먹구름들 순식간에 날아드는 빗줄기들 우산 방패 없이 걸을수록 화살이 뾰족해진다
먼지바람에 휘둘리던 비가 유수流水를 쏘아댄다 화살촉 같은 세상, 화살받이 몸 반동으로 날아드는 활의 높은 명중률을 위해 화살이 마구 날아와 박힌다
시위의 조준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음모일 것이다 화살촉이 독살의 껍질에 박힐 때마다, 혈을 다루는 이들이 왜 바늘로 몸을 무수히 찔러댔는지를 생각한다 쏜살은 언제나 시간과 공범이었다는 암살의 갈피
날아가 버린 비행 궤도를 후회할수록 구름은 휘어지고 화살은 더 쏟아지고 화살촉에 맞을수록 머릿속에서 수천살의 화엄경이 고개를 든다
부러진 시간들은 모두 쏜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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