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그림 속의 산책
프리다 칼로 그림 속서 칼로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도 좋고 ‘부서진 기둥’ 이란 자화상처럼 전차사고로 쇠파이프가 자궁과 골반을 관통하여 온몸이 부서져 일생동안 36여 차례 대수술의 아픔을 함께 해도 좋고, 그림 안에 부패한 거리가 정권이 없으므로 꼰대아버지가 없고, 잔소리누이가 없으므로 내 산책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누대로 이어온 혈통이 없어 좋고, 누대가 없으므로 꽃도 친척이고, 물푸레나무도 형제인 그림 속의 산책, ‘모나리자’ 그림 속으로 산책, 눈썹이 없으므로 휘날리는 첫눈이 모나리자 눈동자로, 내 어깨로 스며도 좋고, 천경자의 ‘생태’의 뱀처럼 긴 몸으로 원죄로 종일 울어도 좋다. 그림이 아니면 자코메티의 작품 ‘걷는 사람’과, 빗방울 풀잎 위에 톡톡 터지는 거리를 지나도 좋다. 르느와르의 ‘여름풍경’ 속에 들어가, 유니콘으로 달려도 좋다. 그림 속에도 바람이 오고, 비가 내리고,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이므로, 나는 그림속의 사람, 불변의 그리움을 가진 사람이라, 사이프러스 향기 휘날리는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을 산책해도 좋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가끔 산책해도 좋고, 마티스의 ‘노랑 인테리어’에 들어가 노랑 잠들어도 좋고, 다시 프리다 칼로 그림 속에 들어가, 극에 달한 고통으로 자해해도 좋고, 그림이 내 생을 좌지우지해도 좋고, 오늘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부르는 그림 속의 산책으로 날 저물어도 좋고, 그림보다 화가에 심취하는 것은 금물, 야수파의 그림, 인상파의 그림 속으로의 산책도 즐거운 것, 밀레의 ‘만종’ 속으로 가도 좋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곁에서, 나도 뜻하지 않는 연인과의 키스, 그렇다고 내가 산책하는 그림은 나만의 세상이 아니므로, 때로 먼지보다 더 가볍게 산책 하는 곳,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과 함께 떠나도 좋고, 이쾌대의 ‘군상’ 속으로 가도 좋고, ‘봄 처녀’를 만나러 가도 좋고, 나혜석의 ‘수원서호’, 아니면 운보 김기창의 ‘바보 산수화’ 의 산책도 좋고,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어깨 들썩이며 산책해도 좋고
나는 그림으로 이사를 하거나 청춘을 옮겨 오래 산책하면 좋겠다. 그림 더 안쪽 덧칠 속에서 바퀴벌레처럼 살아도 행복할 거라는 확신, 나처럼 그림 속으로 산책 나온 사람과 눈이 맞아, 이끼 푸른 우물가에서 백년 사람이 되어도 좋은 것, 표암 강세황의 ‘송하관수도’에 들어가 노인처럼 턱 괴거나 유유자적해도 좋고, 은자가, 미아가 되도 좋고,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라는 고갱의 그림 속에 정신분열로 미쳐도 좋고 블랙홀 내 자화상으로 끝없이 짜부라져 들어가 존재가 아아 사라져도 좋은
계간 『리토피아』 2021년 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명랑하라, 이별아
나 제대로 꿈의 젖꼭지를 물려주지 못하고 어른 노릇 못해 먼 나라의 별로 이민 가서 사이프러스 꼭대기에서 한 살림 차린 너의 이별은 안녕한가. 나 형편 나아져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온 듯 이제 햄버거나 소시지를 넉넉하게 마련하고 끼니를 때우지만 너 이별하고 떠났다 하여 이곳은 별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을 터 아침에 일어난 나는 시에 매달리고 오늘 아침엔 창가에 내가 불안한지 수세미 꽃 노랗게 피어 몰래 염탐을 한다. 그러나 먼 나라지만 명랑하라, 이별아 명랑하지 않은 이별은 이별일 수 없어 이별이 명랑해야 다시 만난다는 기약으로 희망으로 몸바꿈을 서서히 하므로 세상의 모든 이별이 우울하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슬럼가나 연옥과 같아 하니 명랑하라, 이별아, 명랑하라고 하트같이 명랑을 끝없이 날려 보낸다. 명랑은 한 철이 아니라 사시사철이다. 명랑하여 깡통을 걷어차다가 날린 신발이 제멋대로인 세상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게 명랑 하라, 명랑아, 이별아
월간 『공간시학』 2020년 10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연애소설을 읽는 밤
나는 불안하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슬픈 비속으로 흘러가므로 주인공이 권총자살을 하자 자살의 열풍이 불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듯 연애소설을 읽는 밤 줄거리 깊이 빠져 돌아오지 않을까 가끔 뚝뚝 떨어져 나를 일깨우는 창 밖 하얀 목련, 목련 꽃
기어코 마지막 장을 넘기려고 연애소설을 읽는 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비운으로 끝나고 싶은, 사랑을 잃고,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밤이 너무 깊었으니 잠을 자라고 사라지는 질주하던 차 소리
그러나 쉽게 안 올 밤의 끝, 연애소설의 끝, 그리고 연애시절
계간 『시인시대』 2021년 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은숙 시인 / 빌려주는 뼈 외 1편 (0) | 2022.04.14 |
---|---|
박세현 시인 / 남애 외 6편 (0) | 2022.04.14 |
정미 시인 / 초록의 은유 외 1편 (0) | 2022.04.13 |
김명신 시인 / 봄이 꽃을 피우는 것은 당연한가 (0) | 2022.04.13 |
임승유 시인 / 윤달 외 4편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