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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경 시인 / 어두운 수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4.

이문경 시인 / 어두운 수면

 

 

 캄캄한 하늘과 숲은 어두운 수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평의 띠를 이룬 어둠은 한칼의 빛도 멀리 가게 해주었다 아주 먼 곳까지. 터널 속을 나온 새 한마리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초록 눈동자 번득이며 잎사귀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비에 젖은 얼굴 햇빛에 말리며 가벼워져 갔다 뒤에서 노려보던 녹색의 손아귀가 내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가장 예민한 칼날은 가슴에 숨겨야 강해질 텐데 향엽 나무의 얽힌 가지 사이로 당신의 잘린 머리가, 보였다 검붉은 피가 흘러 이제 당신은, 가벼워지나요 당신이 흘린 피와 내가 흘린 피로 잎사귀는 무성해지고 크고 넓어진 혀로 우리를 단숨에 삼켜버릴 텐데, 세상은 우리로부터 잊혀저가요 당신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것으로 쓰러지나요 나는 무엇으로, 쓰러지나요 나뭇가지 끝 불안에 사로잡힌 달의 얼굴 할퀴고 날아가는 새가 보였다

 

 백색 롤 스크린이 내려오는 아침, 녹색 머리카락 풀어헤치고 숲이 나를 쓰러뜨렸다?

 

<'11 시작 여름호>

 

 


 

 

이문경 시인 / 거리의 발레리나

 

 

 여자는 하얀 레이스에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요 아무도 몰라요 그녀가 나가는지. 그녀는 이제 교대역에서 사당역까지 걸어도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흰 나비와 새는 그녀를 날아다니게 하는 걸요 그러다 그녀는 가로수에 부딪칠 뻔해요 흰 나비와 새가 연둣빛 잎사귀로 옮겨가려고 하잖아요 글쎄 그녀의 발이 아스팔트에 빠진 줄을 까맣게 모르나 봐요 불온한 봄이 시작되고 있어요

 

 여자는 꽉 막힌 도로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 사이를 날아다녀요 시계를 들여다보며 신경질을 내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쿡쿡 웃어요 그녀는 그 남자가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해요 운전대를 잡고 졸던 여자는 뒷 차의 경적소리에 깨어나 그녀를 보고 웃고 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시간에 다 길 위에 있는 건지, 그녀는 그들이 이상해 보여요 그들도 어쩌면 거미줄에 갇힌 걸까요

 

 거미가 쳐 놓은 그물 속, 그녀는 거미줄에 갇혀버렸어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거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여자는 자신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달고 다닌 이름표는 너무 무거웠거든요 이제 그녀는 이름표 대신 날개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들의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와요 그들도 날개가 필요한가요 그런데 울다 닫힌 동공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 동굴처럼 안전해 보여요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해요 날개가 아파오기 시작했거든요 불온한 봄이, 계속되고 있어요…….

 

 


 

 

이문경 시인 / 새장 속의 어둠

 

 

지금은 밤이야

너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은빛 날개를 만져 봐

아니 날개 말고 그 아래

내 몸을 만져 봐

조약돌 같은 거기

파도치는 내 심장

우린 거기 살고 있었던 거야

 

한 마리 새와 함께

 

바지랑대 끝 잠자리 날개처럼

나는 가볍고

불면의 밤을 건너 온

새의 눈꺼풀처럼 나는 무거워

 

깃털도 무거워지는

밤이야

천칭(千秤) 왼편에는

너의 깃털

오른편 천칭 위에는

나의 심장 25그램을 올려놓는다

내 심장 속, 눈 감은 적 없는 새 한 마리

 

새장 문을 열어준다

노래하는 새가

그 노래를 잊었기에

 

 


 

이문경 시인

1963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2011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