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옥 시인 / 결(結)
1. 보이지 않는 발길이 중환자실의 어둠을 짚어온다 귀를 바짝 대고서야 들려오는 단말마 그가 생전 처음 불러보는 아름답고도 긴 휘파람 소리 블라인드 사이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희뿌옇게 부각되는 꿈결인 듯 검은 실루엣을 향해 좁혀졌던 동공이 부릅뜬 채 멈췄다 머리맡에 놓인 성경책도 평생의 믿음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저 흰자위 너머 목 잘린 나뭇가지 사이 서쪽 하늘이 조각나있다 땅바닥에 검은 쌀알처럼 흩어져 있는 공포를 작은 머리통을 조아리며 조심스레 쪼아 먹던 참새 떼가 조각난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2. 노인복지관 버스가 비척대며 떠나가는 승강장 뿌리 허옇게 드러난 나뭇등걸이 앉아 있다 버스가 떠나든 말든 복지관에서 뜯어온 화장지를 천천히 펴서 다시 바짝바짝 접고 있는 노인의 고개가 가을 하늘 아래 한없이 깊어진다 살짝 살얼음 낀 듯한 저 손을 본 적이 있다 흰 광목 제치자 툭 떨어지는 얼음장 같던 벌벌 떨며 끝내 잡아주지 못한 마지막 가시던 아버지 손 닮은 수많은 손을 흔들며 버스 한 대 이승을 떠나고 있다
김은옥 시인 / 나를 이장해줘
새벽을 등짐 진 아파트 창이 못 볼 것을 보았는지 꿰뚫듯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층층 어두운 창에서 목 꺾인 뒤통수들이 기어 나온다 굶는 게 직업이었던 스스로 몸에 불 지르고 떠난 노인이 생 자체가 암 덩어리였던 뼈만 남긴 여자가 뼈를 끌며 기어 나온다 뼈들이 시퍼렇게 인광을 불 켜 든다 저 도깨비불 속에는 못다 한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머리통이 몸통보다 큰 아이가 벽을 타고 내려온다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잡수시고 가신 욕쟁이 영감이 흐느적흐느적 대낮에 텅 빈 아파트를 거닐고 있는 이곳은 공동묘지
캄캄해도 더 잘 보이는 길 먹물 속인 데도 움직이는 것 하나 없는 아파트 사이 귀신들이 세 들어 사는지 숨 막히도록 사방에서 목을 조여온다 빈집에서 누가 자꾸 중얼거리신다
사다리차가 팔을 꺾고 이삿짐 차들이 입을 닫고 적막 속 어디선가 띠띠띠 번호키 누르는 소리 풀숲에서 뭔가가 지켜보는 것 같더니 훅 옮겨간다 잔디 깎기 녹슨 조각들이 풀 모가지를 콱 누르고 있는 먼지이불 덮은 산발한 풀숲 너머 깊은 어둠으로
이주기간 : 20××년 2월 1일 ? 20××년 6월 30일(5개월) *******재건축정비사업조합 오늘따라 나무들이 참 정갈하고 고요하다 언젠가 산채로 뽑혀가겠지만
세탁 세탁 세탁 귀신들만이 귀 기울일 저 아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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