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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숙희 시인 / 게발선인장 가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4.

이숙희 시인 / 게발선인장 가시

 

 

손톱 밑 가시가 일어선다

장가한 아들 왜 자꾸 넘겨짚느냐고

핀잔 남기고 돌아간 날

손톱 밑 가시가 찌른다

명절에 모인 형제자매들

별 뜻 없이 던진 말

눈 흘기며 돌아오던 길

게발선인장 가시 성가시다

친구모임에 아는 척 나서다가

말 사이사이 가시 박힐 때

다음 달 안 나갈 거라고

낮에 먹은 생선가시 가시 박는다

노는 데 미쳐 늦게 들어온 날

핑계거리 둘러대다 속 보여주고

양볼에 붉은 가시가시 솟는다

가금씩 먼 산 바라보며 지나쳐온 길

살아가며 헤어지고 싶었던 길

잦은 이사로 길 잃은 낯선 길

집문서 사업밑천으로 날려버리고

대답 없는 잔가시들 대못처럼

걸어와 속살에 박혔다

이제는 풀죽어 집문서 고이 모시고

살아온 살아갈 날 가시 박힌 별들

서쪽 하늘 찌르고 있다

 

 


 

 

이숙희 시인 / 봄 강가

 

 

바람이 발끝 세우고 와서 강물에 몸을 부빈다

주변의 모든 것들도 와서

제 몸을 풀고

하늘은 반만 내려 와 그들을 맞는다

은모래가 아랫도리를 물 속에 담그고

햇볕을 쬐는 오후

잎 하나

뿌리 하나에 묻어오는 이 기운은

전신을 열고

온 강을 끌고 어디로 가나

목까지만 햇볕을 묻힌 봄이

강아지풀 도꼬마리 질경이 민들레들

자리 옮겨 꽃 피우는 모든 공간을 그대로

내어주고

제 몸 무게만큼의 옷을 입고

강 전신을 깨우고 있다

 

 


 

 

이숙희 시인 / 사랑가

 

 

꽃밭으로

태양이 꽂힌다

꽃들도 숨 죽인 오후, 나비

한 마리

꽃잎에 앉아도 옴쭉 않는다

날개에 비벼진 햇살

금빛 얼룩을 지우다 미끄러진다

 

나비가 옮겨 앉는 자리마다

꽃들의 몸이 좁혀진다

잔물결이 팔월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빛처럼

온 사물이 움직임을 주시한다

여린 향기가 꽃노래처럼 얹힌다

꽃잎이 익을수록 그 빛은 치열하다

선명한 잎의 結晶이

여름 오후 쨍 금 하나를 긋고 또 침묵이다

 

 


 

이숙희 시인

1962년 경주에서 출생, 울산에서 성장. 1986년 《한국여성시》 등에 시 발표로 등단. 시집으로 『옥수수밭 옆집』, 『바라보다』 등이 있음. 2015년 제11회 울산작가상 수상. 2018년 울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한국작가회의 회원. 울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