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주 시인 / 꽃밭의 마녀
꽃들의 험담을 엿들어
아기 내다버리기 남의 애인 가로채기 술주정으로 세상 난장판 만들기 새빨간 입술, 샛노란 혓바닥 되바라진 침을 퉤퉤
꽃밭에서 우연히
인어공주 말고 라푼젤 말고 메리다 말고 신데렐라 말고 그녀들을 지독히 괴롭힌 마녀가 바비인형으로
이상한 모자와 망토를 버리고 어머, 이 고운 얼굴 좀 봐 우아한 자태로 꽃에 다가가 향기에 취해 입술을 쏙 내민다면
꽃밭에서 문득
아름다운 유전자 하나로 평생 알리바이가 필요 없는 지능이 필요 없는 꽃들의 아름다운 속성
쪽팔리게 예쁜 소녀들에게 번번이 당하고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마녀의 계보가 의심스러워
꽃밭을 거닐다
김문주 시인 / 관광의 힘
'마더' 영화를 만든 감독이 "국립공원 앞 관광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내리지도 않고 한 시간 춤 만 췄다. 정말 기괴했다." 고 한 신문기사를 읽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 가서 본 기억이라 했다.
한 유명 소설가는 네티즌과 트위터를 통한 100문 100답에서 자신 이 가장 비겁했다고 느꼈을 때는 "산책을 나갔다가 관광버스에서 한 무리의 아줌마 관광객들이 내리 는 장면을 목격하고 허겁지겁 도망쳤을 때다." 라고 했다.
기괴하고, 허겁지겁 도망치게 만든 장본인이 내 마더다 일자무식, 무일푼에 평생 언행이 일치되는 순 바보다
지하, 지상, 공중전에 2차 대전까지 거뜬히 치러냈으니 앞으로도 무사할 듯
관광 핵심멤버인 엄마의 자세 "이박삼일도 출 수 있다카이, 관절은 무신, 팔다리가 자동인디. 강강 한분 갔다 오면 온몸이 깨꼼시러버서..."
노래 한 곡 부르지 않고도 목이 쉬어 돌아오는 이상한 아줌마 커튼이 드리워진 별천지에서 무아지경 지구를 돌리고 와도 밥솥은 신나게 돌아가고 빨래는 힘차게 나부낀다
지극히 개인적인 스토리텔링이라 시시하지만 언제든 외계인을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지구인 관광의 힘!
김문주 시인 / 슬픔에 대한 예의
아기가 울어요. 글자를 파먹고 있는 그곳에서. 다급하게 어린 엄마는 젖 대신 순하고 담백한 종이를 물려요. 볼이 미어터지게 물려요. 술술 휴지가, 탯줄 같은 휴지가 아가를 먹어요. 즙처럼 들이키며 허겁지겁 먹어요. 지금은 한밤인가요, 한낮인가요? 고시원은 죽은 듯이 고요해요.
거룩하고 고요한 방학이에요. 사실은 얼음나라에서 채류기를 쓰는 따분한 방학이에요. 헨젤과 그레텔을 읽는 것만큼 지루해요. 차라리 뿅망치를 가질래요. 갑자기 두더지를 잡고 싶어요. 죄다 잡아서 햇볕에 말리는 거예요. 두더지들이 재미있어 할까요? 아득히 먼 따뜻한 나라에서 점심이 왔어요. 쌍둥이 도시락이 배달 왔어요. 젤리를 노랗게 씹으며 전환이 발상되죠. 개나리 꽃물이 입안에 흥건해요.
2012년 <시사사>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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