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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종국 시인 / 나날들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박종국 시인 / 나날들

 

 

나날들은

언제나 현재로 놓여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없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아무도 본적 없는 세계가 열릴 때까지

 

내 마음 창공의 별처럼

알듯 말듯 한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진실한 정원에서만 자라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 하는 내 마음 그늘과 스며든 여광에 얼룩진 바위까지

 

미지의 움직임 보랏빛 같이

인류를 변화시킬 움직임 같이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깊어지고

 

꿈과 같이 살아보지 않은 현재로 반짝이는 나날들, 나를 꿈밖의 꿈을 꾸게 하는 세월로 꿈틀꿈틀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이

꿈속의 헛소리처럼 무너지는

 

그것들,

 

어느 날 부터인가 뜨락의 나무는 일제히 움을 틔우고 있다

생명의 공간을 향해 가늠 할 수 없는 무서운 힘으로 팽창하는

혐오가 공포를 공포가 신성함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박종국 시인 / 배

 

 

어머니가 사준

꺼먹 고무신 한 켤레

 

그 배를 타고

건너지 못할 강은 없다

 

까맣게 타버린 어머니 속내말고는

 

 


 

 

박종국 시인 / 흑염소

 

 

우리가, 말뚝 박아놓고 매어놓은 고삐만큼

자유가 허락된 흑염소는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의 멍에를 씌워놓고

저를 묶은 밧줄 당기고 당긴다

 

풀밭에서 목메어 우는 건 우리다

 

 


 

 

박종국 시인 / 저녁나절이다

 

 

스멀스멀 기어오른 벌레 같은 어둠이 능선을 갉아먹는 소리, 놀라 뛰는 노루 뒷발에 채인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 암노루 궁뎅이가 희끗희끗 산기슭을 적시는 저녁나절이다

 

그런 틈새에 살아가는 것들, 어슴푸레한 빛 속 어둠이 몰고 오는, 견디기 어려운 푸석거림, 가엾은 마음을 사르는 능선이 붉은 저녁나절이다

 

어둠이 빛을 지우는 부적 같은 한 장의 그림이 드러내 보이는 숲 속에는 꽃과 잎들이 떨며 진주 같은 이슬방울 떨어뜨리고, 껍질을 하나하나 벗는 산봉우리, 장엄한 시간을 알려주는 저녁나절이다

 

잃을 것도 없는 것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저녁나절

어둠이 능선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한 하늘은 밥풀 같은 별 몇 알 오물거리고 있다.

 

 


 

 

박종국 시인 / 보물창고

 

 

밭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보물창고다.

 

갖가지 야채며 곡물들

하나하나는 어우러지고 어울려 밭을 이루고

모든 작물들은 서로서로 의지하는 힘, 작용으로 살아 있다

생생하고 싱그럽다

 

작은 우주 같은

저 싱그러움

얼마나 장관인가

 

그 싱그러움이 너무도 거대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나는 나 자신이 밭을 이루는 한 개 부분으로 느껴졌다

 

도처에서 움직이는 모든 형상과 노력들

만물은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단장을 한다

모두가 양지로 나가고 싶어하는 듯

밭과 들판을 지나서 먼 산골짜기까지 푸르게 단장한다

 

휘둥그레진 내 눈앞에 나타난 초록빛

조용한 세계가 나를 열심히 농사짓게 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는 나는

 

 


 

 

박종국 시인 / 아가리

 

 

어두워질수록

색깔들, 어디론가 사라져갔어요

지금, 이곳에서 사라져버렸어요

말을 잃어버린 나는, 곁에 있던

나무하고 풀잎을 만져 보았어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요

눈을 크게 뜰수록 캄캄했어요

캄캄해질수록 눈을 감아버렸어요

그랬더니, 그 순간부터

사라졌던 색깔들 돌아오고

목젖 없는 커다란 아가리로 왔어요

혓바닥 낼름거리는 아가리로 왔어요

몸뚱아리가 없어요

캄캄한 밤보다 어두운

말, 말들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대낮같이 환하게 밝히고 왔어요

내 머릿속이 하얗게 왔어요

 

 


 

 

박종국 시인 / 뿌리

 

 

뿌리가 힘없이 뽑힌다

한때는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더니

잎이 떨어지고 가지와 줄기까지 메마르자

힘 한 번 못 쓰고 뽑히고 만다

뿌리는 줄기와 가지

잎이 무성할 때 힘을 쓴다

수확을 끝낸 밭에선

아침저녁으로 첫추위가 비치기 시작하고

가을이 감빛으로 여물고 있다

가슴으로 이어진 감빛 깊은 골짜기

밭고랑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생각들 ......

우리 이전의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또 지금은 무엇일까

무엇을 바라야 하고 무엇을 해야 될까

선두에 선 사람은 후미에 있는 사람을 모르는

앞도 뒤도 보지 않는 ,

현재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이곳에 살며 나는 농사를 짓는다

좋다 나쁘다를 가리지 않지만

진가는 제대로 알고 있어

흙과 싸우며 농사를 짓는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박종국 시인 / 태초의 검정

 

 

태초의 하늘은

밤하늘 이었다

 

천지의 시작에는 이름이 없었고

만물의 모태, 밤하늘이 있어 이름이 생겼다

 

밤하늘, 검정은 공간도 아니고

공허도 아닌

없음인 동시에 모든 것이다

 

검정색은 모든 파장을 받아드려 자신 속에 머물게 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어 만물을 창조해 내는 유일한 색이다

 

태초의 검정

밤하늘은 빛 중의 빛이다

 

 


 

 

박종국 시인 / 식물의 색

 

 

초록이다

 

조용하고 넉넉한 그러면서도 중간정도의 저음을 담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에 비교될 수 있는 색이다

 

노란 색에 가까워질 때는 생생하고 활동적이고

파란 쪽으로 깊어질 때는 심각하고 사색적인 색이다

 

누워 움직이지 않는 살찐 암소와 닮은 색이다

 

녹색이다

 

하늘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뿌리 깊은

나무의 색이다

 

사막 한 가운데서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에게 선택되어 부활할 수 있는 낙원의 색이다

 

비인간적이다

 

혐오하는 뱀이나 도마뱀 또는

공포를 불어 넣는 용이나 동화속의 개구리 왕자나

괴물들의 피부를 사람들이 상상하는 색이다

 

태양 에너지를 피부로 곧장 흡수하는

변온 동물 피부의 색이다

 

왜 그럴까

 

식물의 색은 영혼의 사냥꾼,

사랑의 색인 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박종국 시인 / 토마토

 

 

잘 익은 한 알이 되기까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붉은 얼굴, 한 알 한 알

모든 악령을 쫓아낼 듯이 선명한 것은

 

새벽을 알리는 닭벼슬처럼

어둠의 문을 열어 보이며 다가오는 것은

 

어둠으로부터 탄생하는

검은 예술, 어둠을 밝히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쑥쑥 자라 붉게 물들 때까지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씨앗을 뿌리고

잡풀을 뽑아내고 북을 주고

농약 대신 막걸리를 뿌리고

보기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던

어두운 시간을 떠올린 나는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고생 사라진

밭에서, 지인들과

잘 익어 쩌억 쩍 갈라진

속을 훤하게 열어 보이는

나눔의 정을 주렁주렁 엮어간다.

 

속죄의 땅을 열어 보이는

 

 


 

 

박종국 시인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집으로 가는 길』과 『하염없이 붉은 말』 『새하얀 거짓말』 『누가 흔들고 있을까』가 있음. 2015년 조지훈문학상, 2016년 시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