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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윤훈 시인 / 사랑에 부침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이윤훈 시인 / 사랑에 부침

- 눈, 비, 꽃, 얼음불꽃

 

 

1

 

불시에 침입해 집 안의 것들을 흩뜨리고 떠난

산짐승

나뒹구는 접시들

파헤쳐진 부엌 바닥

 

한때 들이닥친 사랑이 그랬다

 

눈이 오고

오래도록 밖을 본다

눈 아래 모든 것이 상처 아닌 것이 없음을…

 

기울어진 난로를 세워 불을 지핀다

 

2

 

느닷없이 퍼붓는 비

 

몇 겁의 어느 인연인지

길가의 나무

뿌리까지 흠뻑 젖는다

 

사랑이란 때로 이런 것이다

 

지나다 그 앞에 서서 나도

흠뻑 맞는다

내생의 비까지

 

3

 

저리 붉음을 무엇으로 말할까

 

몸에 돋친 가시

오로지

그것으로 말할 수밖에!

 

애초 연둣빛 혀였던

여린 잎들

숨 막히도록 다 말아

마침내 세운

날카로운 외마디들

 

아, 생의 급소에서 피는 꽃

명자꽃

이보다 붉은 사랑이 또 있을까

 

4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쇄빙선

얼어붙은 물의 뼈마디를 으스러뜨리고

얼음심장을 뚫고 나간다

사랑이 그렇다

 

언 바다가 열리고

푸른 길 위에 빛나는 폐허

천 개의 눈이 번뜩인다

사랑이 온몸으로 밀고 간 그 자리가 그렇다

 

알 수 없는 깊이 위에서

매순간 부딪히며

해를 끌고 직항하는 쇄빙선

무엇도 그 앞을 막아설 수 없다

 

하얗게 튀는 얼음불꽃

찬란한 몰락

오라, 사랑아

새아침 눈부시게 부서지리라

 

 


 

 

이윤훈 시인 / 별

 

 

바람 솟는 밤 지상의 아픈 것들 하늘에 올라 별이 되나요

별들이 지나는 길목 천공의 등뼈가 휘고 있어요

 

내 별의 항로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비껴나 있는 것인지

흰 나리꽃은 내 화병에서 썩어가고

 

죽음을 봉인한 편지봉투 그 피 묻은 입술을 열었어요

맨드라미 씨처럼 왈칵 쏟아진 비명

주워 담을 수 없었어요

 

죽음의 암초

피의 격류

청춘은

파란 거머리

내 피를 다 빨아버리고 말았어요

 

가시덤불 속 꽃은 왜 그토록 몸부림쳐 피는지

오늘 오후를 탱고에 다 바쳐야 했어요

 

벼랑 끝 아스라한 은방울꽃

내 절망의 깊이에요

 

뒤틀린 별자리들

새떼들이 날개를 꺾어 늪으로 떨어지는 꿈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두려워요

 

바람은 깊은 밤 속으로 별들을 휘몰고

나는 처음으로 상처를 깊이 들여다봐요

 

상처마다 들어와 박히는 별들

빛의 길을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어쩌면 그 별 중 더러는 지금 절대어둠일지 몰라요

 

지상의 아픈 것들 하늘에 올라 별이 되나요

바람은 더 세차게 별들을 몰고

폐허의 뜰

나는 내 별의 항로를 다시 찾아보아요

 

ㅡ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년 10월호

 

 


 

 

이윤훈 시인 / 옹이가 있던 자리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장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바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ㅡ 200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이윤훈 시인 /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그대는 내 새하얀 털을 좋아하나 나는 내 발톱의 본능을 좋아한다

그대는 내 둥근 눈을 믿으나 나는 내 수염의 직감을 믿는다

그대는 내 아양을 즐기나 나는 내 고독한 천성을 즐긴다

그대는 나를 소파와 침대에 두나 내 마음은 난간과 지붕에 끌린다

그대는 나를 따스한 품속에 가두나 내 심장은 미친 종처럼 울린다

사랑은 실로 참혹한 끈이다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이윤훈 시인 / 고공식사

 

 

불멸

거미가 가진 가장 슬픈 꿈

그러나 불멸  

허공 높은 곳 거미가 집을 짓는 까닭

 

오랜 침묵 끝

날것들의 비상을 거머쥐고

오찬을 누리는 거미

날것의 죽음을 다시 빛실로 뽑는다

 

잡히지 않는 바람

그것을 자유로이 두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텅 빈 집

 

아침 천 개의 이슬이 눈을 뜨는

찬연한 그러나 불멸을 위해

허물어야 하는 집

 

이 적막한 눈부심 속의  

고공식사  

 

어쩔 수 없는 거미의 슬픈 작업

거미의 흔들리는 높이다

 

 


 

 

이윤훈 시인 / 소금쟁이의 노래

 

 

물은 유혹, 부드러이 나를 잡아끄는 유혹, 밀치며 나는 팽팽히 그 유혹을 누리는 소금쟁이, 가만히 떠 있거나 재빨리 움직이며 물 위에 춤을 그리는 나는, 가벼움으로 나의 중심을 잡는 나는,

 

맑은 물은 깊이를 숨기고, 달처럼 떠오르는 돌, 닿으려 하면 내 목을 감싸는 말랑한 손, 황홀한 죽음의 시작, 순간 잔털 속의 공기들이 나를 떠올리어 나를 깨우고, 떠 있는 낙엽, 죽은 나방과 개미들, 물 위는 풍요로운 소금쟁이의 천국,

 

물은 늘 내게 깊이를 강요하지만 내가 자유로운 것은 마음을 물 위에 두기 때문, 까닭에 나는 물 위에서 물의 깊이를 누리는 소금쟁이, 물 위에 춤을 그리는 나는, 자유로움으로 나의 중심을 잡는 나는,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2008년 천년의시작

 

 


 

이윤훈 시인

경기도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나를 사랑한다,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