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훈 시인 / 사랑에 부침 - 눈, 비, 꽃, 얼음불꽃
1
불시에 침입해 집 안의 것들을 흩뜨리고 떠난 산짐승 나뒹구는 접시들 파헤쳐진 부엌 바닥
한때 들이닥친 사랑이 그랬다
눈이 오고 오래도록 밖을 본다 눈 아래 모든 것이 상처 아닌 것이 없음을…
기울어진 난로를 세워 불을 지핀다
2
느닷없이 퍼붓는 비
몇 겁의 어느 인연인지 길가의 나무 뿌리까지 흠뻑 젖는다
사랑이란 때로 이런 것이다
지나다 그 앞에 서서 나도 흠뻑 맞는다 내생의 비까지
3
저리 붉음을 무엇으로 말할까
몸에 돋친 가시 오로지 그것으로 말할 수밖에!
애초 연둣빛 혀였던 여린 잎들 숨 막히도록 다 말아 마침내 세운 날카로운 외마디들
아, 생의 급소에서 피는 꽃 명자꽃 이보다 붉은 사랑이 또 있을까
4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쇄빙선 얼어붙은 물의 뼈마디를 으스러뜨리고 얼음심장을 뚫고 나간다 사랑이 그렇다
언 바다가 열리고 푸른 길 위에 빛나는 폐허 천 개의 눈이 번뜩인다 사랑이 온몸으로 밀고 간 그 자리가 그렇다
알 수 없는 깊이 위에서 매순간 부딪히며 해를 끌고 직항하는 쇄빙선 무엇도 그 앞을 막아설 수 없다
하얗게 튀는 얼음불꽃 찬란한 몰락 오라, 사랑아 새아침 눈부시게 부서지리라
이윤훈 시인 / 별
바람 솟는 밤 지상의 아픈 것들 하늘에 올라 별이 되나요 별들이 지나는 길목 천공의 등뼈가 휘고 있어요
내 별의 항로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비껴나 있는 것인지 흰 나리꽃은 내 화병에서 썩어가고
죽음을 봉인한 편지봉투 그 피 묻은 입술을 열었어요 맨드라미 씨처럼 왈칵 쏟아진 비명 주워 담을 수 없었어요
죽음의 암초 피의 격류 청춘은 파란 거머리 내 피를 다 빨아버리고 말았어요
가시덤불 속 꽃은 왜 그토록 몸부림쳐 피는지 오늘 오후를 탱고에 다 바쳐야 했어요
벼랑 끝 아스라한 은방울꽃 내 절망의 깊이에요
뒤틀린 별자리들 새떼들이 날개를 꺾어 늪으로 떨어지는 꿈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두려워요
바람은 깊은 밤 속으로 별들을 휘몰고 나는 처음으로 상처를 깊이 들여다봐요
상처마다 들어와 박히는 별들 빛의 길을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어쩌면 그 별 중 더러는 지금 절대어둠일지 몰라요
지상의 아픈 것들 하늘에 올라 별이 되나요 바람은 더 세차게 별들을 몰고 폐허의 뜰 나는 내 별의 항로를 다시 찾아보아요
ㅡ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년 10월호
이윤훈 시인 / 옹이가 있던 자리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장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바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ㅡ 200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이윤훈 시인 /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그대는 내 새하얀 털을 좋아하나 나는 내 발톱의 본능을 좋아한다 그대는 내 둥근 눈을 믿으나 나는 내 수염의 직감을 믿는다 그대는 내 아양을 즐기나 나는 내 고독한 천성을 즐긴다 그대는 나를 소파와 침대에 두나 내 마음은 난간과 지붕에 끌린다 그대는 나를 따스한 품속에 가두나 내 심장은 미친 종처럼 울린다 사랑은 실로 참혹한 끈이다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이윤훈 시인 / 고공식사
불멸 거미가 가진 가장 슬픈 꿈 그러나 불멸 허공 높은 곳 거미가 집을 짓는 까닭
오랜 침묵 끝 날것들의 비상을 거머쥐고 오찬을 누리는 거미 날것의 죽음을 다시 빛실로 뽑는다
잡히지 않는 바람 그것을 자유로이 두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텅 빈 집
아침 천 개의 이슬이 눈을 뜨는 찬연한 그러나 불멸을 위해 허물어야 하는 집
이 적막한 눈부심 속의 고공식사
어쩔 수 없는 거미의 슬픈 작업 거미의 흔들리는 높이다
이윤훈 시인 / 소금쟁이의 노래
물은 유혹, 부드러이 나를 잡아끄는 유혹, 밀치며 나는 팽팽히 그 유혹을 누리는 소금쟁이, 가만히 떠 있거나 재빨리 움직이며 물 위에 춤을 그리는 나는, 가벼움으로 나의 중심을 잡는 나는,
맑은 물은 깊이를 숨기고, 달처럼 떠오르는 돌, 닿으려 하면 내 목을 감싸는 말랑한 손, 황홀한 죽음의 시작, 순간 잔털 속의 공기들이 나를 떠올리어 나를 깨우고, 떠 있는 낙엽, 죽은 나방과 개미들, 물 위는 풍요로운 소금쟁이의 천국,
물은 늘 내게 깊이를 강요하지만 내가 자유로운 것은 마음을 물 위에 두기 때문, 까닭에 나는 물 위에서 물의 깊이를 누리는 소금쟁이, 물 위에 춤을 그리는 나는, 자유로움으로 나의 중심을 잡는 나는,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2008년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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