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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선 시인 / 앉은뱅이 밥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정영선 시인 / 앉은뱅이 밥상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정영선 시인 / 금빛집

 

 

연못을 그리고

그 물가에 집을 한 채 그린다

 

떠받치고 선 그 집의 팔뚝이 안쓰러워

연못에 비친 그림자는

물주름으로 살짝 찌그러뜨린다

 

아무도 들이지 않는 입구를 그리고

깊숙한 안채에 있는

어둠이 기웃하게 한다

 

그 집 쪽으로 한 뼘씩 휘어지고 있는

소나무를 그린다

그래도 그 집에는 닿지 못하는

 

마을로 가는 오솔길을 그리다 말고

(이 집에 사는 이는 누구로 할까 생각한다

순하게 물로 흘러가지 못한 생각들이 머무는 집)

 

나는 그 집에 금칠을 한다

지붕만을 그대로 기와로 남겨두고

처마를, 벽을, 창을 온통 황금칠한다

 

황혼녘이면 활활 더 빛나는

누구나 그런 집을 한 채 하나 마음속에

품고 산다.

 

 


 

 

정영선 시인 / 창문은 은행을 품고 거리를 열고 있다

 

 

수퍼 옆 은행이 지점으로 승격된 날

한 쪽 벽이 허물리고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바뀌었다

안팎이 환하게 읽혀져서

안에서 읽으면

창문은 은행을 품고 거리를 열고 있다

밖에서 읽으면

거리를 품고 은행을 열고 있다

하늘은 후박나무까지 데리고 은행 깊숙이 들어와

푸줏간 아저씨와 떡집 아줌마의 함지박 웃음에 핀

명절 신바람을 세고 있다

 

그만 나도 내 안의 벽을 허물고 싶다

안전제일을 신조로

넘볼 수도, 넘보이지도 않게 나는

벽돌 하나씩을 올려 놓으면서 살아왔는데

마음 중심에 벽 하나 튼튼히 쌓아졌는데

앞이 보이지 않게 벽이 높아졌는데

외로운 나비 한 마리 거느리고

풍경이 몸 비비며 쑥 들어올 수 있도록

벽돌이 탄탄하게 구축한 벽의 자리에

그 자리에

커다랗게 구멍부터 뚫는 난공사를 해낼 수 있을까

피 한 방울, 살 한 점 저밈 없이

오늘도 나는 전전긍긍하며

공연히 은행에 들러

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바라본다

 

 


 

 

정영선 시인 /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내 손안에 든 돌멩이 하나, 빤질빤질한 이마를 하고 있다. 깜깜하게 눈감고 있다. 나는 돌멩이에게 말 건다. 내 말들을 잡아먹고 묵묵하다. 침묵을 거느린다. 침묵이 거느리는 둘레는 무겁다. 둘레는 둘레의 그림자를 거느린다. 그 둘레 안에 나는 산다. 몸을 오므린다. 돌멩이가 꿈꾸는 꿈을 꾼다. 돌멩이가 피리 불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는 꿈을 꾼다. 오래 깨고 싶지 않아 몸을 더 오므린다.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침마다 내 마음 울타리에 한 송이씩 속엣말을 빨갛게 토하는 덩굴장미. 울타리 가득 번지는 붉은 말들의 잔치 흥겹다. 나는 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꿈꾼다.

 

시집<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문학동네.2000

 

 


 

정영선 시인

부산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문학동네 2000), 『콩에서콩나물까지의 거리』(랜덤하우스, 2007)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서정시학,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