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정숙 시인 / 피 묻은 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황정숙 시인 / 피 묻은 뿔

 

 

마포곱창집에서 천엽과 생간이 나왔다

접시 앞에서 나무젓가락을 발톱처럼 세우고

침을 삼키는 내 모습

동물원 우리 안에 있었다

사육사 손에 들려진 고기 덩어리를

한 입에 삼키고 침 흘리던 사자

서성거리며 짝을 부르는 발정기라 했다

 

큼직하게 썬 생간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마른 뿌리에 물 닿듯 식욕이 당겨

혀를 적시고 식도를 넓혀 길을 내던

불온하고 습한 숲을 기억한다

 

소가 걸어온 도막 난 길

접시에 담겨 불빛을 핥고 있다

도르르 말린 천엽 속 울음주머니를 건드렸는지

울컥 입덧인 양 치미는 역겨움

얇게 썬 마늘 몇 쪽 급히 털어 넣는 순간,

매콤하고 아릿함이 태반을 저며 들었다

 

별안간 내 안의 동굴 벽을

피 묻은 뿔로 치받으며 걸어 나오는

저, 붉은 짐승.

 

 


 

 

황정숙 시인 / 연못

 

 

연풍(軟風)이 불자 연못 속에서 아코디언 바람통이 떠올랐다.

 

서서히 바람은 주름으로 몰려온다

밖에서 안으로 좁혀질 때마다

물 위에 표적판을 그리는 바람통, 나이테 같은 바람통, 공명음을 내는 바람통.

 

버드나무의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에 걸고

물그림자로 떨고 있는 구름이 바람의 시간에 머무는 동안

저 연못은

허공으로 날아오를 날개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화살이 되어 수심 속으로 꽂히는 저 물의 심장은

가장자리로 번져보는 것이 평생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도 없이 침묵으로 들어가는 일

언젠가는 물방울이 시작된 곳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겠구나.

 

연못을 바람통처럼 접었다가 펴자

파문의 음각들이 물 위로 소용돌이친다

물저울에 올려진 구름의 무게로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는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시작된 생의 변주곡.

 

물수제비로 던져진 돌팔매에

마지막 음표 비늘을 털고 있다.

 

 


 

 

황정숙 시인 / 전신이 위장인 것들

 

 

다 쓴 치약을

마지막까지 짜고 짠 치약을

버리기 전에 꾹 한 번 더 짜본다

내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 첫아이를 밀어내던 산통이

엄지손가락을 통해 올라온다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을 주다

아직도 내가 나를 밀어내려는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꾹꾹 밀려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제 구멍을 기억하고 있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생긴

깊고 아득한 둥근 모양

그래서 세상은 구멍에서 나온 것들의 영역이 아닌가

위로 나오거나 아래로 나오거나

 

몸속에서 몸을 밀어내는 것들

열리지 않고 닫힌 채 팽창하는 것들

온몸이 출구이자 길이 되는 것들

 

내 안의 산통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일

어느 쪽으로 밀어내고 버려야 하는지 모르는 일

안과 밖이 없는 몸이 무덤인

꾹꾹 떠밀려 나올 줄만 아는 내 안의 소화하지 못했던 시간

마지막까지 제 몸을 짜내고 스스로 비워지는 한 生 이라니

 

죽어 가벼워진 것들

뚜껑을 열자

마지막 구멍인 동시에 시작으로 이어진 길이 있었다

평생 전신이 위장인 것들이라니

 

 


 

황정숙 시인

1962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 2008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2012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엄마들이 쑥쑥 자라난다』(한국문연, 2012)가 있음. 제7회 시흥문학상 입상. '시마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