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숙 시인 / 피 묻은 뿔
마포곱창집에서 천엽과 생간이 나왔다 접시 앞에서 나무젓가락을 발톱처럼 세우고 침을 삼키는 내 모습 동물원 우리 안에 있었다 사육사 손에 들려진 고기 덩어리를 한 입에 삼키고 침 흘리던 사자 서성거리며 짝을 부르는 발정기라 했다
큼직하게 썬 생간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마른 뿌리에 물 닿듯 식욕이 당겨 혀를 적시고 식도를 넓혀 길을 내던 불온하고 습한 숲을 기억한다
소가 걸어온 도막 난 길 접시에 담겨 불빛을 핥고 있다 도르르 말린 천엽 속 울음주머니를 건드렸는지 울컥 입덧인 양 치미는 역겨움 얇게 썬 마늘 몇 쪽 급히 털어 넣는 순간, 매콤하고 아릿함이 태반을 저며 들었다
별안간 내 안의 동굴 벽을 피 묻은 뿔로 치받으며 걸어 나오는 저, 붉은 짐승.
황정숙 시인 / 연못
연풍(軟風)이 불자 연못 속에서 아코디언 바람통이 떠올랐다.
서서히 바람은 주름으로 몰려온다 밖에서 안으로 좁혀질 때마다 물 위에 표적판을 그리는 바람통, 나이테 같은 바람통, 공명음을 내는 바람통.
버드나무의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에 걸고 물그림자로 떨고 있는 구름이 바람의 시간에 머무는 동안 저 연못은 허공으로 날아오를 날개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화살이 되어 수심 속으로 꽂히는 저 물의 심장은 가장자리로 번져보는 것이 평생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도 없이 침묵으로 들어가는 일 언젠가는 물방울이 시작된 곳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겠구나.
연못을 바람통처럼 접었다가 펴자 파문의 음각들이 물 위로 소용돌이친다 물저울에 올려진 구름의 무게로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는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시작된 생의 변주곡.
물수제비로 던져진 돌팔매에 마지막 음표 비늘을 털고 있다.
황정숙 시인 / 전신이 위장인 것들
다 쓴 치약을 마지막까지 짜고 짠 치약을 버리기 전에 꾹 한 번 더 짜본다 내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 첫아이를 밀어내던 산통이 엄지손가락을 통해 올라온다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을 주다 아직도 내가 나를 밀어내려는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꾹꾹 밀려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제 구멍을 기억하고 있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생긴 깊고 아득한 둥근 모양 그래서 세상은 구멍에서 나온 것들의 영역이 아닌가 위로 나오거나 아래로 나오거나
몸속에서 몸을 밀어내는 것들 열리지 않고 닫힌 채 팽창하는 것들 온몸이 출구이자 길이 되는 것들
내 안의 산통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일 어느 쪽으로 밀어내고 버려야 하는지 모르는 일 안과 밖이 없는 몸이 무덤인 꾹꾹 떠밀려 나올 줄만 아는 내 안의 소화하지 못했던 시간 마지막까지 제 몸을 짜내고 스스로 비워지는 한 生 이라니
죽어 가벼워진 것들 뚜껑을 열자 마지막 구멍인 동시에 시작으로 이어진 길이 있었다 평생 전신이 위장인 것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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