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옥 시인 / 괜찮네, 고맙네
늦가을 산책중에 더러 만나게 되던 해사하고 얇은 꽃송이들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와본다.
여전히 그 꽃송이들이 있었다.반갑기도 하여라. 시야에는 하얀 망초꽃, 연노랑의 씀바귀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늦가을 들어 또 한번 고개를 들긴 했으나 의기소침이 역력하다. 화창한 봄날 무성하게 개화하여 강단있게 흔들리던 것들, 측은하기도 하여라.
곧 닥쳐올 무서리의 아침을, 무자비한 기습을 조마조마 내다보는 꽃송이들에게 '내 앞에 와 주어 고맙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스스로의 저의를 살핀다. 아무래도 뜨겁게 '고맙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본심이 아니었다고 , 말이 잘못 나왔었다고 그 누군가 진심을 시원하게 털어놔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리라 . '고맙다'는 말을 앞질러 준비해놓고서.
한영옥 시인 / 측은하고, 반갑고
딸 많은 우리 어머니
이 딸에겐 저 딸 얘기 저 딸에겐 이 딸 얘기 점잖으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던 걸 이 사람에게 저 사람 흘리고 저 사람에게 이 사람 흘리고 사람이 모질어서 그런 것 아니라네 말이라는 게 원래 정처가 없다네 오래전 고향을 잃었다는 낭패감에 외롭고 허전해서 불쑥불쑥 앞질러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것이네 모르는 새 앞지른 말 놓쳐버리고 울상지으며 안절부절하는 이여 괜찮네 본심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우리의 말, 늦가을에 다시 피어나는 봄꽃처럼 얇아서 늘 조마조마하던걸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주름 그걸로 충분하네 이해가 오고 있네 측은하고 반갑고 또 많이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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