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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영옥 시인 / 괜찮네, 고맙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한영옥 시인 / 괜찮네, 고맙네

 

 

늦가을 산책중에 더러 만나게 되던 해사하고 얇은 꽃송이들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와본다.

 

여전히 그 꽃송이들이 있었다.반갑기도 하여라. 시야에는 하얀 망초꽃, 연노랑의 씀바귀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늦가을 들어 또 한번 고개를 들긴 했으나 의기소침이 역력하다. 화창한 봄날 무성하게 개화하여 강단있게 흔들리던 것들, 측은하기도 하여라.

 

곧 닥쳐올 무서리의 아침을, 무자비한 기습을 조마조마 내다보는 꽃송이들에게 '내 앞에 와 주어 고맙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스스로의 저의를 살핀다. 아무래도 뜨겁게 '고맙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본심이 아니었다고 , 말이 잘못 나왔었다고 그 누군가 진심을 시원하게 털어놔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리라 . '고맙다'는 말을 앞질러 준비해놓고서.

 

 


 

 

한영옥 시인 / 측은하고, 반갑고

 

 

딸 많은 우리 어머니

 

이 딸에겐 저 딸 얘기

저 딸에겐 이 딸 얘기

점잖으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던 걸

이 사람에게 저 사람 흘리고

저 사람에게 이 사람 흘리고

사람이 모질어서 그런 것 아니라네

말이라는 게 원래 정처가 없다네

오래전 고향을 잃었다는 낭패감에

외롭고 허전해서 불쑥불쑥 앞질러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것이네

모르는 새 앞지른 말 놓쳐버리고

울상지으며 안절부절하는 이여

괜찮네 본심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우리의 말, 늦가을에 다시 피어나는

봄꽃처럼 얇아서 늘 조마조마하던걸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주름

그걸로 충분하네 이해가 오고 있네

측은하고 반갑고 또 많이 고맙네

 

 


 

한영옥 시인

1950년 서울에서 출생. 성신여대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안개편지』,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등이 있음. 1997년 한국예술비평가상, 2000년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