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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한용 시인 / 공룡알 화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5.

정한용 시인 / 공룡알 화석

 

 

그거 있잖아요, 참을 수 없는 존재, 그거, 세 번 읽었거든요, 첫 번째 도대체 무슨 소린지, 두 번짼 재미가 조금, 이번 세 번짼 정말 놀라웠어요, 어쩜 그렇게 잘 짜인 그물 같은지, 촘촘하게,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겠지만, 지저분하고 고상하다가 뜬금없이, 이내 뜨물처럼 흘러가는 거,

 

자꾸 말 끊지 말아요, 난 농담이 더 좋던데, 말 한마디 툭 던진 게, 가벼운 농담, 우리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 툭, 가볍게 그냥 농담, 그게 한 사람 일생의 무게를 뒤집잖아요, 아니다, 쪼그라들게, 아니다, 씨를 말리게, 아니다, 삭아서 쭉정이만 남게 만드는데,

 

이번에 왜 가즈오 이시구로 있잖아요, 날 버리지만가, 네버렛미곤가, 하여튼, 또 다른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어딘가에서 내 몸을 갖고 산다면, 삶에 희망이 있는 건지, 모두 삭아서 허공만 남기는 건 똑같은데 말이에요, 겨우 일억 년도 못 살면서, 화석도 못 되면서,

 

그런데, 이게 갈대예요, 아니다, 삘긴가, 어렸을 때 하얗게 꽃이 피면 뽑아서 빨아먹었는데, 아니다, 꽃은 아닐 거야, 그런데 알이 어디 있죠? 겨우 몇 개뿐, 죽음이 너무 단순화되었네요, 추상화라고 해야 하나, 멸종될 것이고 어둠이 내리겠죠, 우리에게도,

 

있잖아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농담처럼 그냥 사라지지 말자고, 기념으로 우리 알 한 개씩 낳아요, 복제해요, 지금, 여기.

 

 


 

 

정한용 시인 / 디지털 소녀

 

 

내가 사랑했던 소녀.

너보다 디지털이 좋아, 고백했던 소녀.

하루에 한 움큼씩 알약을 털어 넣고 디지털 음료를 마시던 소녀.

잠을 자다 꿈속에 플러그를 꽂아 디지털 영화를 보여주던 소녀.

쥐와 닭들이 오물을 뒤집어쓴 채 찍찍꽥꽥 시끄러워도 아랑곳하지 않던 소녀.

 

우리 늙으면 한날한시에 바다에 가서 죽어요, 웃는 듯 우는 듯 중얼거리던 소녀.

가끔은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꺼내, 잘 구워졌어, 먹어, 내밀던 소녀.

택시를 탈 때마다 디지털 화폐를 내밀며 깎아 달라 조르던 소녀.

광화문에서 시청을 거쳐 청계천까지 유령처럼 떠다니며 촛불을 흔들던 소녀.

너만 있으면 백 년 동안 밥 안 먹고도 배부르다고, 그게 슬프다고, 울던 소녀.

 

붉은 블라우스 틈으로 흰 찐빵 같은 가슴을 보라 꽃잎처럼 살며시 열던 소녀.

나 사실은 술 못해, 이 술이 디지털이라 마시는 거야, 잠들기 전에 노래를 불러달라던 소녀.

달력에 ‘디지털/디지털/디지털’이라고 쓰다 ‘아, 털이 싫어’라고 고쳐 쓰던 소녀.

네 시는 왜 전철 유리벽에 안 나와, 물어보던 소녀.

내가 답이 없자, 사랑도 모두 디지털이야, 우기던 소녀.

 

거짓말은 육체와 떼려야 뗄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이론을 펴던 소녀.

세상이 지랄 같은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며 담벼락에 머리를 찧던 소녀.

이 땅에 더 이상 봄은 오지 않을 거야, 영원히 겨울이면 좋겠다던 소녀.

피로 피를 씻든지 혁명이 일어나면 다시 올게, 안개처럼 사라졌다 백만 년 후에 다시 나타난 소녀.

지금은 디지털 세계에서 공인한 늙은 소녀.

 

 


 

 

정한용 시인 / 초밥을 먹으며

 

 

소식 없이 한 계절 보낸 뒤

아들을 만나 초밥을 먹는다.

생선살로 싼 밥을 고추냉이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매콤한 공기가 콧속을 흔들자

오래 묵은 눈물이 스며 나온다.

내가 갔던 독일은 너무 멀고

내가 머물다 떠난 너의 마음도 너무 멀고

내가 애써 지우려 한 사람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밥알에는 적당한 온기와 물기가 섞여

끼리끼리 착 달라붙어 있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잘게 흩어진다.

몸을 잃은 생선도 제 살점이 씹히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잠시 나눈 의례와 기록도

언젠가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 시간은 엷어졌다 언제 또 무의식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접시가 다 비고, 나는 나의 길로

아들은 아들의 길로

밥은 밥의 길로, 생선은 생선의 길로

각자 제 살 곳을 향해 말없이 흩어진다.

겨울 접히고 봄이 펼쳐진다.

 

 


 

 

정한용 시인 / 좌우에 대한 숙고

 

 

몇 년 전부터 노안인가 싶더니, 이젠 안경이 잘 안 맞는다. 양쪽이 서로 어긋난다. 왼쪽으로 보는 세상은 흐리지만 부드럽고 따뜻한데, 오른쪽으로 보는 세상은 환하지만 모가 나고 차갑다. 둘 사이의 불화와 냉전에 속앓이가 심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 쌓인 원한이 있었다. 수구와 진보의 싸움은 식상한 것이 되었고,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짓물렀다. 정상과학을 두고 벌인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논쟁에 대해서는 논문으로 까발린 적도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리영희 선생께서 일갈했지만, 나는 차라리 두 세상을 따로국밥처럼 몸속에 나눠놓고 살겠다. 왼쪽 눈이 쓰린 날은 막걸리에 해물파전을 먹고, 오른쪽 눈이 부신 날은 소주에 삼겹살을 먹겠다.

 

 


 

 

정한용 시인 / 베끼다

 

 

엄마 해봐, 음~ 마~, 아기가 엄마를 베낄 때

엄마는 아기를 벗긴다.

 

우리들은 베끼고 벗기면서 서로 닮는다. 거미줄을 베껴 방탄복을 만들고, 나뭇잎을 벗겨 태양전지판을 만든다. 달팽이를 베껴 접착제를 만들고, 나비날개를 벗겨 디스플레이 패널을 만든다. ‘자기야, 날 벗겨봐.’ 애인들은 밤마다 서로를 베낀다. 뜨겁게 엉킨 몸 위로, 자박자박 천 년이 흘러가고,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제국의 시대로 넘어간다. 간혹 혁명이 일고, 가끔은 미래로 밀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리 없이 감춘다.

 

내가 너를 은밀히 베끼는 사이

너도 나를 살포시 벗긴다, 불륜의 뜨거운 밤,

표절의 공범이 된다.

 

 


 

정한용 시인

1958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부문 당선, 1985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민음사, 1990), 『슬픈 산타 페』(세계사, 1994), 『나나 이야기』(민음사, 1999), 『흰 꽃』(문학동네, 2006),  『유령들』(민음사, 2011)과  평론집에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가 있음. 천상병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인터넷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