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하 시인 / 흙·소·리
그러나 네가 없는 새벽이 싫었다 나를 초과하는 나를 부축하며 무수하게 음각했던 기호들 평면을 껴입으면 으스러질 듯 조여 오는 외로움
문을 나서면 문 안에 남겨진 나는 영원히 지워진 행이 될 것 같은 기분에 깜빡깜빡 웃었다
혼자 누워 바라보는 천장은 지독히 멀다
눈부셔보지도 못한 채 쏟아지는 햇빛에 물을 뿌리며 한철을 보냈다 이별한 적이 없어 기다릴 수 없었던 시간마다 이름을 붙여 소리 나는 대로 너를 읽었다 매일 다른 느낌이어서 불행하지는 않지만, 시간은 흐르지도 않아, 라는 문장 사이에 너의 허리를 내놓았다
너를 망칠 수는 없었어
차가움과 따뜻함 사이에 뜨거움이 있다는 걸 불 속에서 단단해진 내 손자국과 균열들이 극단의 결합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부터 아는 사람까지 휘휘, 붉은 휘파람을 불며 너를 그리움으로 삼았던 누군가를 본떠 그토록 오래 계절을 식히고 있었다
매번 첫 번째 계절은 서정적인 너였다
-시집 『오렌지나무를 해답으로 칠게요』 중
최지하 시인 / 고양이의 눈물
누가 울음을 그쳤는지 몰라야 한다. 눈물과 수건 사이에서 속눈썹이 계속 떨린다는 것을 결코 몰라야 한다. 흘러내리는 저녁이감정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도. 불편한 바닥을 끌어 모으는 어둠의 집착도. 아직도 나는 저곳이고 너는 이곳이어서. 수평이 없는 의자에서 일어설 방법을 몰라서 아직은. 멀리 가면 안 되니까 아직은.
높은 음으로 그려 넣은 고요 안에서 아픔의 중심에 닿은 것처럼 고양이가 운다 시간과 공간의 둘레를 돌며 붉은 막을 벗지 못한 그의 새끼들을 핥으며 운다
반드시 도착해야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과 그곳은 늘 멀리 있다는 사실과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양이의 눈물과 겹친 문장 같다
소금기 말라붙은 계절이 그리운 채로 오래 머물러 있을 때
흉터가 늘어난 고독으로 인해 허기를 바라보는 법이 정교해졌다
최지하 시인 / 안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늙은 방향으로부터 변심한 애인처럼 오지 않는 내일을
나란히 피어있는 아파트를 따라 어지러운 속도로 지는 꽃잎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부디 노련해지는 일이거나
내가 지나침과 멀어짐 사이를 살고 있는 사이 알아볼 수 없는 세상의 끝에 주검 같은 것이 우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가 발을 뻗는 곳으로 장미 넝쿨이 견고해지고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기는 담장과 경사진 어깨가 닮아서 나는 자꾸만 거기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은 거냐고 안부를 묻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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