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우 시인 / 귀와 뿔
눈 내린 숲을 걸었다. 쓰러진 천사 위로 새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천사를 등에 업었다. 집으로 데려와 잠든 천사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말을 배웠다. 날개에는 작은 귀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귀를 훔쳤다. 귀를 달빛에 비쳤다. 두 귀, 두 개의 깃. 인간의 귀는 언제부터 천사의 말을 잊었을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과 타들어가는 귀는 깃을 달아주러 오는 밤의 둘레, 인간의 안으로만 자라는 귀는 끝이 둥근 칼날, 되돌려 주지 않는 신의 목소리, 불로 맺혔다가 어둠으로 눈을 뜨는 안, 인간에게만 닫혀 있고 웅크리는 불이 있다. 어둠을 들으려 할 때 귓바퀴를 맴도는 날갯짓은 인간과 천사의 사이 끼어드는 빛의 귀, 불이 매달려 있다고 말하면 귓불을 뿔이라고 말하면 두 귀, 두 개의 뿔.
시집『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 2021) 중에서
정현우 시인 / 세례
잠자리 날개를 잘랐다 장롱이 기울어졌다.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나는 본 적 없는 장면을 슬퍼했다. 산파가 어머니의 몸을 가르고 아버지가 나를 안았을 때, 땅속에 심은 개가 흰 수국으로 필때,
인간은 기형의 바닷바람, 얼음나무 숲을 쓰려뜨려도 그칠 수 없는 눈물이 갈비뼈에 진주알로 박혀 있다는 생각
그것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절반은 전염병에 눈이 없어진 불구로 가득했다.
창밖 자목련이 바람을 비틀고 빛이 들지 않는 미래 사랑에 눈이 먼 누나들은 서로의 눈곱을 떼어주고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귓속에 붙은 천사들을 창밖으로 털었다.
시집『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 2021) 중에서
정현우 시인 / 면(面)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명원 시인 / 건강 검진 외 2편 (0) | 2022.04.14 |
---|---|
이문경 시인 / 어두운 수면 외 2편 (0) | 2022.04.14 |
김재현 시인 / 클리셰 외 1편 (0) | 2022.04.14 |
안은숙 시인 / 빌려주는 뼈 외 1편 (0) | 2022.04.14 |
박세현 시인 / 남애 외 6편 (0) | 2022.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