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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세현 시인 / 허무맹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8.

박세현 시인 / 허무맹랑

 

 

허무맹랑한 일들이 좋다

허무하거나 맹랑한 말들 역사들 사람들

국가들 선언들이 좋아졌다

왠지는 나도 모를 일

허무맹랑에는 답이라 할만한 게 없다

그것이 좋을 뿐이다

 

뜻있는 삶이라는 문장처럼

뜻없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같다

허무맹랑한 삶이라면 모를까

 

매일 밥을 먹고

매일 잠을 자고

매일 자판을 두드리고

매일

매일

 

 


 

 

박세현 시인 /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30년 만에 소집된 얼굴들을 만나니 그 낯짝 속에

근대사의 주름이 옹기 종기 박혀있다

좀이 먹은 제몫의 세월 한접시 씩 받아놓고

다들 무거운 침묵에 접어 들었다

화물차기사, 보험설계사, 동사무소 직원, 카센타 주인, 죽은 놈

만만찮은 인생 실력들이지만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력하다 한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이 없는 배역 하나씩 떠맡고 있다

찻집은 문을 닫았고 바다도 묵언에 든 시간

뒤걸음치듯 몇몇은 강문에서 경포대까지

반생을 몇걸음 요약하며 걸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던 간밤의

풍경들이 또한 피안처럼 멀었다.

 

 


 

 

박세현 시인 / 눈

 

 

창가에 앉았다

환한 창밖을 열었다.

저기 저건너

새하얀 눈이 내린다

어디서 오는걸까?

누구를 반기려는걸까?

뽀얀 눈!

갸느린 나뭇가지에 앉는다.

누구를 기다리는걸까?

그 님

이모습 보고있을까?

기다리다 지쳐

눈은 금방 눈물되어

울음으로 노래한다.

님이 그립노라고

 

 


 

박세현 시인

1953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관동대 국어교육학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에서 '김유정 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83년 《문예중앙》 여름호에 〈오랑캐꽃을 위하여〉를 포함해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지은 책으로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 『길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정선 아리랑』, 『치악산』, 『본의아니게』 등의 시집과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세계』, 산문집 『설렘』 등이 있음. 상지영서대학 문예창작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