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희 시인 / 아웃사이더
벽에 등을 대고 잠시 잠이 들다가 더 이상 깨어날 수 없도록 책상을 눌렀다 모든 게 잠에서 비롯되었다는 듯 책상에 뼈까지 밀어 넣었다
추위에 단단해진 문장과 싸웠는지 기포가 가득찬 세상이 싫었는지 그는 어제의 체위만 고집했다 오래된 책방처럼 길에 닿지 않는 것이 익숙했다
등뼈를 타고 있는 그늘이나 눈빛들이 원고지를 닮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몸 한쪽을 칼바람이 베어 먹을 때도 끈질기게 절개지에 달라붙어 숨을 참았다
그는 내 몸에 완벽하게 붙어있으면서도 나에게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떨어뜨린 그림자조차 안과 밖이 고요해서 그 죽음의 징후가 떨리는 순간
그가 땅바닥에 옆구리를 대고 누웠다 깊은 상처를 숨기려는 듯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더 이상 나 아닌 너로 다시는 한 몸으로 함께 죽을 수도 없게
변두리 구석에서 시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꿈틀거리며 단단해진 뿌리까지 딸려 나왔다 모든 게 멀어질수록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듯 가는 활자들이 행간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집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 중
한성희 시인 / 아직은 무엇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어떤 잠은 죽음은 너무 조용해서 잠인지 죽음인지 누구도 모르게 우리 곁을 지나간다
가장 낮은 그림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벽에서 벽으로 바닥에서 바닥으로 스며드는 사이
우리는 식탁이 어두워진다 외길에서 검은 잎사귀가 바닥에 흩날리고 목숨처럼 비바람이 눈발이 후려치고
침묵으로 뼈와 살이 으스러질 때마다 그곳 바닥은 영혼을 기다리는 자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고요해진다
우리는 풍경 너머에서 죽은 나무로 살아있어 돌아서서 등으로 운다 바람이 누워버릴 때까지 울고 울어서
잠이 잠으로 끝나지 않는 그 잠이 죽음이 구분되지 않아서 벽에서, 바닥으로, 어깨뼈가 무릎이 썩은 냄새로 축축해진다.
어둠 깊숙이 무엇이 무엇에 닿는지 알 수 없이 아직은 무엇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그 검은 날갯짓에게
어느 날 오후의 빛처럼 바닥에 등을 눕히고 우리는 비로소 한 줌에서 한 줌으로 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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