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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도훈 시인 / 병산서원(長山書院)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8.

한도훈 시인 / 병산서원(長山書院)에서

 

 

푸른 병산(山) 절벽 위에서

아침해가

공중제비 몇 번 하다가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안개더미 속으로 수직낙하 해

볼우물이 아름다운 물그림을 그려냈다.

걸음 바쁜 도요새 울음소리

낙동강 모래사장에 가득하고

강변 풀숲에선 입 큰 메기가

눈 던 콩중이나 팥중이를

잡아 먹으러 나왔다가

병산(山) 코숭이에서 떨어지는

아침해를 날름 주어덕고는

혓바닥 데었다고 엄살 부렸다.

 

아침 공기 새초롬 해서

머드러기 사과나 씹으며

솔밭 산책길에 나섰는데

엄벙뗑 바람개비 돌지 않아도

저절로 눈은 획획 돌아가고

민낯의 만대루가 눈앞에 섰다.

그 만대루 기와 끝자락

배롱나무꽃 사이로 보이는

달보드레한 열매달의 병산서원이여!

만권의 책 대신

달팽이 모양의 머슴뒷간에서

지천명(知天命) 세월 동안

허릅숭이로 쌓아온

금빛 욕망의 록(毒)을 다 쏟아놓았다.

 

코숭이 : 산줄기 끝자락.

더드러기 : 가장 좋은 물건, 여기서는 사과

허릅숭이 : 일을 실답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한도훈 시인 / 지리산 해넘이

 

 

정월 초하루

한 세월이 박피(薄皮) 되던 날

찰랑찰랑 향기나는 한살매

그 목숨줄을 잇기 위해

내 운명을 뛰어넘는 명도적이 되어

삼지창 들고 뱃사공을 위협하며

겨우 삼도내 건넜더니

온 산에 해꽃 피듯

굽이굽이 타들어가는 해넘이 햇살

즈믄 날 즈믄 밤을

지리산이 쿨렁쿨렁 울어대고

먼 남해바다가

훌렁 뒤집어졌다는 얘기

노루막이 떡갈나무 가지를 붙들고

서러운 황토빛이나

뭉텅 토해내고파

천왕봉으로 달려가는데

저렇게 산봉우리가 황소를 닮았는지

두억시니 장난으로 생긴

산그림자 따라 두루미 쌍으로 날고

다붓이 손각시가 핏빛 손짓을 하면   

몽달귀가 부리나케 달려 나와

발 아래 무릎을 꿇고

황금빛 별꽃다발을 내미는 것은

반야 해넘이가

천왕 해돋이를 사랑하느라

시방, 가쁜 숨이 넘어가는 거지

 

한살매 : 평생

해꽃 : ‘햇무리’의 방언

노루막이 : 산의 막다른 꼭대기

두억시니 : 모질고 사나운 귀신

다붓이 : 떨어진 사이가 멀지 않은

손각시 : 처녀귀신

몽달귀 : 총각귀신

 

 


 

한도훈 시인

동화작가, 여행작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4 시와문화 등단. 시집 : <오늘, 악어떼가 자살을 했다> <홍시> <코피의 향기> 동화 :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소라의 용못> 소설 : <소설 그리스로마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