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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류빈 시인 / 편백나무의 영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9.

제9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최류빈 시인 / 편백나무의 영토

 

 

면면이 창백한 사람들 어깨 접고 섰다

여기부턴 백의종군의 성토라는 듯 흰 돌 줄 지어 방어진을 펴듯

빙벽 너머에선 얼음 부서지는 소리 풋내 가시지 않은 고사리들이 손을 엮더라

물의 결정들이 고공침투하는 이 계절 예측된 왜란은 없다

 

나를 밀어낸 이 땅의 생채기다 아니 내가 속한 영토의 설움이다

나 밀어낸 저 이기의 숙명이다 아아, 너를 뒤덮는 물이-

함초롬히 오른다

 

그 속에서 고고한 죽문(竹文) 청화백자 하나

전운을 감지한 듯 바닥부터 미묘히 진동하고 있다

그저 대나무 줄기 죽비처럼 뻗어 저 장롱 속에 웅크리면

약탈될 뿐 절대 깨어질 일 없는 백자의 관상

왜놈들의 신줏단지라도 모시며 반짝거릴 수도

어디 가 빌붙어 치욕스레 요강이나마 살 수 있었다

바람 앞 불길이 거세, 고왔던 유약 다 녹아나는 시간

백자는 이토록 찬란한 사금파리가 되는 방식, 스스로 택한 거다

먼저 청학 날아가던 날개 깨 집어 아무렇게나 겨누고

부리가 그려졌던 조각 집어 칼처럼 끝을 맞드는 거다

고고한 외다리 학은 집어 치우고 털 뽑힌 민둥 두루미처럼

두 다리 벼락처럼 지상에 꽂는 비수

그 다음은 구름이 살았던 길을 어루만져보는 거다

깨진 구름이야말로 심장에 낮게 걸려 두려움 가려주는 방패를 살아

저기 굴러다니는 대나무 뼈와 깨지지 않는 학의 눈동자

구름에 가린 달처럼 푸르게, 붉게 점염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끝 마다 이 생의 지문 다 묻히고

불꽃 속부터 다시 구워지는 탄신이 저 편에서 오는데

백의 벗고 푸른 눈동자 켜는 조각들 쩍쩍 대륙처럼 갈라지다가

눈동자 속 스테인드글라스로 딱, 휘영청 야밤의 빛 머금다가

 

숲의 육신에 가로줄을 긋고선 점멸하는 눈

초록에 새하얀 눈 침범해도 이 곳은 아무래도 편백나무의 땅

북유럽 어느 비밀의 숲처럼 아무리 밀어도

길쭉한 장대, 장승처럼 서서 하는 무언의 포효

표정을 지우고 곁을 내주면 장성을 쌓아

머리를 털고 탈고하는 계절,

 

눈 내린 편백나무 설경, 하얀 숲에서

깨어진 죽비 틈으로

붉은 상처 밀려 오르더라

 

 


 

 

최류빈 시인 / 이건 벌일까. 유유

 

 

부엌에 홀로 와 앉자 식탁보 위 펼쳐진 *만다라

밤은 처절하게 한 글자로 불려온 역사를 살아

 

우리가 포옹하면 허공은 속살이 되고

펴면 소슬하게 시린 팔오금

무엇을 어떻게 포옹하지

 

안녕 나의 유유, 듣고 있는지

우리는 이름으로 불린 적 없으니 우는 소리로 명명해볼까

희한하다 혼자서도 키스할 수 있는 저녁마다

꽉 쥔 하루 풀어내며 오는 체크무늬 표정들

탁자 위 글라스에 몰래 담는 언어 스칠 때마다

이건 병(病)일까 유유, 우리는 홀로 괜찮다고 말하면서

가끔 앓는 소릴 내면서 기일-게 울잖아 낭인(浪人)처럼, 유유

 

음식에 주사를 놓는 것처럼 아, 젓가락을 들고

너는 무언가를 씹는 척 우물거리는 복화술

우린 책상 위 걸터앉아 다만 질펀한 밥에 수저를 꽂고, 침묵

당신의 입모양은 알아들을 수 없고,

이건 제(祭)일까 유유, 연무 하나 오르지 않는 밤의 아귀에서

다정하게 나눌 단어가 여기 남아있는지

 

식탁에 놓인 꽃병 기린 같은 목

쓸어주려다 너를 안아주려 뻗는 팔마디 내가 시린 건

 

접시 위에다 유골 같은 생선 등뼈 우리

다 쏟아낸 잔가시들 그러모아 글자를 만들까, 유유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의 하나. 본질이라는 의미

 

 


 

최류빈(崔柳頻) 시인

1993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생물공학, 시설경영학 전공 중. 2017년《포엠포엠》에 <간빙기 밥통> 등 3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렌지 신전』 『장미氏, 정오에 피어줄 수 있나요』가 있음. 2018년 광주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