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란 시인 / 너라는 오지
너를 벗어나고도 나의 서사는 아직 네 속에 있었으므로
잡히지 않는 맥락을 찾아 백날을 소모하고도 알 수 없는 너는
단숨에 도착하기 힘든 세상 권태를 모르는 신이 만든 종교와도 같이 비밀처럼 깊은 곳에 있다, 다만 있다
"더 가야 해?" "거의 다 왔어!"
거의란 얼마나 가까운 거리일까 눈대중으로 거리를 짐작하다 또박또박 외로워지는 사이
어떤 결말도 없이 행간에 사로잡힌 기다림으로 너라는 오지를 잠깐 들썩이게 할 수 있다면 부리 잘린 새들※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도 밟은 적 없는 페이지, 이따금 아름다웠으나 종종 쓸모없이 잊히기도 하는 온갖 잡풀을 걷어내기 시작하면 잠깐 깨어나는 세계
생략되지 않는 슬픔만이 긴 문장이 되어 밤새 이리저리 펜 끝을 끌고 가는
너라는 오지
※ 안희연 시인의 시,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에서 차용함
조영란,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시인동네, 2021,
조영란 시인 / 간극
입술을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이념처럼
형체도 없이 나의 지표가 되어버린 세계
섣불리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세계
가면이든 최면이든
끝내 가닿을 수 없는 당신의 세계
너무 오래 지척에 갇혀 있는 온전한 세계
조영란 시인 / 거미줄의 날들
섣불리 날아든 건 나였으므로 분별없이 절벽을 향해 가던 마음도 용기라 불렀지 자책하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가벼운 입김 한번에도 무섭게 출렁거렸지만 나는 봄밤에 사라진 봄을 하염없이 기다렸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추억이 찢겨나갈 때도 버성긴 틈으로 사나운 돌풍이 드나들 때도 긴긴 밤을 더는 캄캄하다 말하지 않았네 고작 줄 하나 끊어내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나의 하루는 간신히 발을 떼면 또다시 엉겨 붙는 두려움처럼 점도 높은 불안에 싸여 있었던 것 실낱같은 믿음 위에서 떨며 흔들렸던 것 밤사이 빗방울 다녀가고 이제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나 침묵으로 전해온 안부에 흔들흔들 장단 맞추는 중이네 왕성한 식욕을 감춘 손바닥으로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 이 쓸쓸한 거미줄의 날에
조영란 시인 / 보호색
스스로 배경이 되어야만 했던 날들이었다.
나를 부인할수록 타협이라는 무니는 더욱 선명해 졌다
위장할수록 심란해지는 변신
깊은 두려움 속에서 흔한 슬픔도 없이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조영란 시인 / 유리병
투명해지고 싶었지만 분명해지고 싶었지만
어딘가 자꾸 금이 가고 있어
굴절된 어제 때문에 누군가 불어넣은 뜨거운 숨결 때문에
부딪치지 않는 하루는 없어 부딪쳐서 하루가 되는 거야
깨질 곳이 있었다 깨어져야 할 곳이 있었다
바닥에서 툭툭 뛰는 심장을 본다
손대면 베일 듯 살아있다
조영란 시인 / 부추 키우기
봄이 쓸쓸해서 부추를 심었다. 씨앗부터 시작된 진득한 기다림이었다. 햇빛은 땅을 품었고 때때로 내 마음의 그늘도 품었지만 바람이 흔들고 간 자리마다 잡초가 올라왔다. 풀을 뽑고 난 다음날 아침에 또 다른 풀들이 자라 있었다. 잡념처럼 억센 집념이었다. 삶을 지탱하는 힘이란 저런게 아닐까. 저마다 색다른 자신만의 숨결로 몸을 밀어 올리는 풀들을 나는 잡초라 부르기만 했으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껏 움트고자 하는 싹이 없었거나 싹을 까맣게 잊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싹을 틔우다가도 쉽게 포기 했거나. 그렇게 나를 놓치는 일이 잦았던 것. 잡초 사이에서 수척해진 부추를 보며 엄마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부추가 굵어지나요? 밑동 가까이 잘라줘야 다음엔 더 굵게 올라온단다! 나는 부추를 잘라내며 중얼거렸다. 여린 마음을 끊어낼 수 있어야 굳센 다음이 있다고, 이별 없이 새로울 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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