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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은주 시인 / 말랑말랑한 외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9.

황은주 시인 / 말랑말랑한 외면

 

 

가장 먼 곳이 가장 잘 지워지는 곳이라 표시를 했다.

 

회색 풍경이 얼마나 밝은지

얼마나 어두운지 몰라 지워야 했다

쓱쓱, 회색 고무지우개로 풍경을 문질렀다

 

풍경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풍경을 뭉치는 것이라 표시했었다

 

남쪽에서 온 목이 긴 볕이 북쪽 그림자로 꺾이는 자리

표시된 사람은 늘 그런 곳에 서 있다

세 살 적 하얀 이빨과 하얀 향이 나던 이름

뒹구는 소꿉놀이 속에선

마흔 살의 민무늬 일기장과

시든 웃음졸기가 까맣게 타고 있었다

 

여울 없는 물웅덩이에 달이 고이면 달의 기억이 멀어진다고 표시했었다

 

달을 향해 주문을 속삭였다

사라지지마사라지지마사라져

공터로 회색 바람이 불어왔고

그 자리라는 표시만 남고 모두 지워진다

닳아버린 풍경, 닳아지지 않는 고무지우개

짙을수록 잘 뭉쳐져 옅을수록 잘 뭉개져 古畵처럼 부드럽게 지워졌다

쓰다만 지우개는 재미가 없다

 

시간을 들지 않고서는 떠나지 마세요*

 

지워진 자리가 말랑말랑하다

회색을 건너면 다시 공터가 되는 눈 내리는 4월의 지도를 들고 가장 멀리 돌돌 말려 가고 싶다

 

* 알랭 로브그리예 소설, '고무지우개' 중

 

 


 

 

황은주 시인 / 연두의 대답

 

 

숲 그림자가 내려앉을 물결을 찾는다

아직은 노란 해와 초록이 뒤엉키는 연두의 바다

- 일 년 뒤에 돌아올게

 

골목에서 연두의 기별을 물으니

열매 없는 초록이 모과나무라 한다

지난 해 모과나무의 수태는 연두였고 올해는 눈먼 장님 나무의 표정이란다

남반구의 징검다리를 건너

초록물뱀자리에 발을 담그면 햇살이 발에 물들어 따뜻하다

연두의 그물은 그악스러워

더위 벌레의 여량餘糧까지 포획한단다

 

한 가지에는 이파리와 메아리가 함께 있어

마음 밖 이야기를 가장 시기하고

자명한 속 씨의 눈을 숨기고 노랗게 물들어 간단다

너무 딱딱한 무게란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십자로 걸어다니던 장화의 놀이, 떠돌이 유령을 세면서 떼어내던 연두 이파리들, 홀수라는 말을 씹으면 알알해지던 혓바닥

 

짙어지기 전에 흐려지는 색色의 계절이 돌아오지 않겠니

계절 멀리 떠나지 못하는 연두의 소리

나무를 간질이는 숨바꼭질

살얼음에 해가 비치면 우박을 떨어뜨려 놀래키는

연둣빛 적란운

 

일 년 뒤는 너무 딱딱해

대신 세상의 대답들이나 여물게 해 줘

 

 


 

 

황은주 시인 / 비슈뉴의 옷자락

- 최초의 옷은 사라졌고 유골은 수천 개 비즈들과 누워 있었다.

 

 

옷감을 펼쳐 몸을 재어 선을 긋고 시간을 재어 시접을 남긴다. 가위의 무게는 항쇄 만큼이나 무겁다. 천형의 천 밑에서 싹둑, 잘려 나가는 조각들, 가변의 파편들로 듬성듬성 시침질해 놓은 누더기를 마네킹에게 입힌다. 지금은 거짓을 연출해야 할 때, 거짓의 형상 거짓의 바느질

 

옷은 무늬로 된 겉과 주머니로 된 안을 나누어 가졌다. 깊숙이 숨은 것을 찾아 더듬으면 손가락에 닿는 알록달록한 꿈, 옷을 뒤집어 주머니를 박을 땐 틈이 없어야 한다. 옷 속을 기어다니는 애벌레, 주름마다 배인 술래라는 습성, 기어가도 여전한 문이고 옷의 허리둘레 를 따라 촘촘히 주름을 잡는 일이 여전한 되풀이다

 

구부러진 가슴과 늘어진 등을 이어붙이는 만 번째 바느질, 어깨 마다 진주구슬을 달아 햇볕에 펼치면 완연한 몸이다.

 

아름다운 집이네요

만 개의 덩굴 잎으로 그늘을 입은 낡은 그 집

 

가장 편안한 옷을 입을 때는 아직 문을 떠나기 전이고 구겨지는 소리 없이 몸은 익숙한 팔과 익숙한 다리를 벗을 것이고 깊숙한 벽장의 문 닫는 소리 삐걱댈 것이다

 

텅 빈 마네킹, 뭉개진 손가락 지문이 재생되는 달력의 붉은 첫 장. 쉿, 그 집 아이가 이제 막 배내옷을 입는다

 

 


 

 

황은주 시인 / 등고선 재배

 

 

올해도 고산高山의 경작은 서툴렀다

뭉쳐지지 않는 공기와 헐떡거리는 맛과 울렁이는 가로이랑

 

기우제의 바위 앞에 서면 농부인 누르부의 눈과 귀는 입보다 먼저 닫혔다. 가축들의 비탈진 발굽이 부서지고, 풍요를 위해 계곡에 떨어뜨린 울음도 많았다. 척박한 것만 되는 농사였다. 넓은 밭에 설익는 산소를 경작하는 농사법, 바람이 그은 가벼운 지름길을 찾는 법을 배우기 전에 아들은 터널 공사장으로 떠났다

 

몸 뒤의 그림자마저 저려오는 햇빛이 있다

목요일에 태어나 누르부라는 이름을 가졌다

 

휘청거리는 무릎에도 뒤엉킨 적 없는 절기였지만 목성 가까운 새벽 머리 맡일수록 가파른 심장박동, 멈추기 전에 가지런한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데, 능선마다의 불면을 깨우는 호우주의보.

 

빗물의 헐떡이는 들숨과 날숨 뒤에 간신히 싹을 틔우는 칭커밭. 이랑과 이랑 사이, 축축해져 가뿐한 지름길로 흰 뿔이 수확하는 푸른 전설은 돌아오겠지

 

흙빛 얼굴에 키운 듬성한 백발과 주름들의 급경사, 아들이 돌아올 길에 심은 자두나무는 말라비틀어져 있고, 경계 넘어 날아온 검독수리를 쫓는 누르부의 시선.

 

오늘은 허리 굽은 농부가 새의 묘지에 묻히는 날

등고선 하나가 통째로 날아오르는 날

 

 


 

 

황은주 시인 / 되돌이표 비명

 

 

반달모양의 빗에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왜 바람의 집을 나왔니? 그냥요

 

창 없는 방은 각이 깊어 모서리마다에서는 아이들이 요람을 짓는다 이곳에 웅크려 가라앉지 않은 어제의 숨고르기를 한다 연필 같은 돌들, 가방 같은 돌들, 주먹 같은 돌들이 우르르 쏟아져도 교실은 언제나 고요했다. 둥글지 못한 아이, 소리치지 못한 아이. 멀어지는 왼쪽 시력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수만 겹 그물로 만들어갔다. 더듬거리며 오른쪽 출구만을 찾아야 할까? 바람은 분주하게 비둘기 떼를 뒤쫓았다. 바람을 따라 역 광장에서 비둘기 떼를 쫓는 날들, 소낙비 온다며 구구구 비둘기를 부르는 날들, 소녀는 둥글둥글 한낮을 보낼 줄도 알았고 되돌이표를 따라 귀가 먹먹하도록 비명을 지를 줄도 알았다. 계단에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었다. 머리가 유난히 길어서 어느 곳의 바람이 닿아도 흩날렸다. 지하도에서의 잠고대는 지상으로 꽃다지를 피워 올릴 마법사의 노란 주문, 머무는 불안보다 떠도는 불안에 더 안심했다. 기차를 동경하지는 않았다 그냥, 바람처럼 걸으면 어딘가였다.

 

세상의 모든 길은 바람 속으로 숨는다.

눈동자 가득 2월의 바람을 담은 소녀가 눈을 뜬 채 길에서 잠들었다

처음 바람이 깨진 곳은 어디일까

꽃바람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

언젠가는 바람이 그 머리카락을 데려갈 줄 알았다

 

비둘기 떼가 반달을 물어오는 밤

 

 


 

황은주 시인

1966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2012년 《중앙일보》 제13회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에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가 당선되어 등단. 현재 수원 동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