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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보경 시인 / 새라고 부르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9.

한보경 시인 / 새라고 부르기

 

 

꿈속으로 깃든 그를 새라고 부르기는 미안했다

등 뒤에는 생시처럼 뜨겁게 국밥이 끓고있어

미안하다는 말을 일단 접어두고 뜨거운 국밥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다

젖은 우산을 털듯

굽은 어깨에 야윈 살들을 구겨 넣고

침묵에 빠진 그를

새가 아닌 다른 말로 부르기가 적절하지 않아서

그런데도 가을은 미처 가지 않아서

지키지 못한 우리의 약속을 좀 더 유예하자고

겨드랑이에 접어둔 구겨진 시 한 편을 꺼내 펼쳤다

막 끓여낸 국밥이 작은 방을 뿌옇게 뭉개고

국밥 안으로 눈물 같은 시가 뚝뚝 떨어져서 나른하게 풀어졌다

후르륵 젖은 날개를 펴고 시가 날아갔다

날아가는 그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처음으로

새라고 불러보았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너무 젖어있어서

코끝이 까맣고 빨간 새 한 마리가 가을을 건너려 할 때

코끝이 까맣고 빨간 그 새를 그냥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득했다

 

 


 

 

한보경 시인 / 진개장의 무늬들

 

 

홀로 남기로 한 것과 이미 홀로였던 것들이

새로운 의기투합을 쌓고 있다

 

속도를 멈춘 시간과 시간이 멈춘 속도가

서로의 속도를 깎아 먹고 서로의 시간을 헐어 내린다

 

단호한 것과 모호한 것들은 관계라는 관계를 무너뜨린다

이쪽과 저쪽들이 머뭇거린다

망설이는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무늬가 돋는다

 

한때의 햇살과

등 굽은 상처와 냄새 나는 푸른곰팡이들이,

너무 일찍 식어버린 소통과

억압과 억지가 이끌고 온 단절들이,

서로의 이력을 얼버무리며

중얼중얼 무늬가 되어간다

 

젖어버린 옹알이의 출처와

굳은살의 잔여 시간은

아무런 주석을 달지 않고도 사방연속의 얼룩이다

 

긴 망설임의 다음을 예감하는

무늬와 무늬들은

 

그렇고 그러하게, 어떤 무늬가 되어간다

 

 


 

 

한보경 시인 / 아리랑 1호

 

 

우주에서

그의 부고가 날아 왔다

 

잠깐,

휴대폰 배터리를 빼 놓은 채

 

그는

수신 불가의 우주 계곡 속으로

너무 깊숙이 걸어 들어가

 

무량겁의 자유를 켜놓고 있는 것인지,

 

너무 오래

그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

 

 


 

 

한보경 시인 / 장식장 속 그릇처럼

 

 

적당한 거리가, 서로를 오래 빛나게 해요

포개지고 엎어진 관계는 결론은 없어도, 끝장은 보고 말아요

무리지어 사는 것이 혼자인 것보다

훨씬 막다른 것이거든요

금속성 의치와 잇몸 사이처럼, 때론

이질적인 틈새가 필요해요

세상의 모든 이질감은 틈새와 의기투합 하거든요

당신과 나 사이

그런 틈새 하나, 꼭 필요해요

 

 


 

 

한보경 시인 / 그늘의 탄생

 

 

왼쪽으로 누운 그늘은 오른쪽이 궁금했다

오른쪽으로 누운 그늘은 왼쪽이 궁금했다

 

한 쪽만 바라보느라 그늘은 늘

어둡고 쓸쓸했다

종일 바닥에 등을 늘이고

얼키설키 숨어

왼쪽과 오른쪽은

볼 수 없는 오른쪽과 왼쪽을 발굴하기로 했다

오른쪽이 숨겨놓은

왼쪽과

왼쪽이 숨겨놓은 오른쪽,

얽힌 복선의 가닥들을 풀어 내리며

그늘은

제 몸을 방류하는 법에 대하여 골몰했다

왼쪽과 오른쪽의 가닥들이

서로에게 간절한 부재가 될 때까지

엉긴 몸의 카르마를

가르마처럼 가르고 또 갈랐다

 

그늘의 왼쪽과

오른쪽은, 오른쪽과 왼쪽이 되었다

 

 


 

한보경 시인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및 대학원 졸업. 2009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웹 월간시 <젊은시인들> 편집장. 시집으로 『여기가 거기였을 때』(지혜사랑, 2013), 『덤, 덤』이 있음.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