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 시인 / 연잎에 한 방울 -6월 오후의 자미원
한방울이 소용있을까 의심하며 한방울로 가능할까 수런거리며 빗방울이 연잎으로 내려온다
연못은 빗금으로 가득하고 하늘은 흐림으로 가득하다
연잎이 자라나서 연못을 다 덮을 때까지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다
오목한 연잎 속으로 한 방울, 또 한 방울 연잎에 내려앉는 한 방울, 흐린 빗방울이 내려온다
연잎은 배꼽 같고, 빗방울은 연잎 위를 굴러다니는 철없는 아이의 웃음소리 같고 마냥 그렇게 저희끼리 어깨를 포개는 동안 마지막 그 한 방울 연잎의 배꼽에 닿는 순간
연못이 하나가 되어 왈칵 어깨를 내어주는 춤추고 흔들리는 그 순간 웃음소리, 흐린 날 연못 속에 사는 누군가의 큰 웃음소리 천지를 울리는 커다란 북소리
연잎이 가리고 있던 못물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 안의 흐린 것들이 왈칵 흙탕물을 드러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제 얼굴을 몽땅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계간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저녁에 박하
흰 커튼으로 무얼 가릴 수 있을까 휘발된 아침이 돌아오면 처음인 듯 들어오는 빛
그날 아침얼굴은 너무 차가웠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나보다 나를 더 간섭하는 것
새 연필, 새 노트, 손대지 않으면서 자꾸만 새것을 사고 있다
우주 공간 어디선가 네 목소리가 낯선 행성을 돌고 있나 보다 창을 열면 박하 향이 공기 중에 머물다 사라진다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새벽노을, 항상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 봄이면 푸른 들판에서 불쑥 손 내미는 감정처럼 환한 대낮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별
뭘까, 몸을 가진다는 것은 이 창백한 별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은
스위스라는 나라 알지, 거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대, 왜 우린 캄캄해져야 별을 볼 수 있지
그 별은 이미 폭발했거나 거기 없을지도 몰라, 별은 우주 공간을 달려서 지금 막 우리 눈에 닿은거래 죽은 다음에도 캄캄하게 달려온 거지 네가 빛을 향해 달려가듯이
계간 『문예바다』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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